지나간 시간들
지난 2월, 동창 D로부터 구입한 그림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12월 3일 이사한 새 집의 거실 벽면이다. 정성껏 포장되어 택배로 부쳐 온 10호짜리 수채화, 감나무 그림. 반 년 이상을 꽁꽁 싸인 채 베란다 한 모퉁이에 숨죽이고 있었다.
작년 한 해 부산에서 열린 D의 전시회에 봄, 가을, 두 번 다녀왔다. 두 번째 전시회장에서 만난 감나무 그림. 그 앞에 오래 머물렀다. 그림 속에 담겨 있는 나만의 이야기들을 읽어 내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아련한 서사 속으로 빠져 들었다.
40여 년 부지런히 드나든 경남 함안의 시골집, 시댁이 있었고 휘어져 돌아가는 하아얀 흙길 끝에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친정집이 있었다.
구석구석 아버님의 정성스런 손길이 담겨 있는 시골집의 역사, 그곳에서 평안한 노년을 보내셨던 부모님들의 생애, 남편의 은퇴 후 2년 간 큰시누 부부와 우리 부부 넷이 어설프지만 열심히 텃밭농사 했던 세월. 이제 남의 집이 된 지도 어언 5년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그 집의 모든 공간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힘들기도 했고 그립기도 한 많은 시간과 이야기들이 녹아 있는 집,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살아 기록될 집이다.
또 하나 소중한 내 유년의 집, 태어나서 20년 가까이 살았던 부산 가야의 집. 넓은 텃밭과 마당을 초록으로 뒤덮고 있던 갖가지 야채들과 철 따라 예쁜 자태와 화려한 색깔을 뿜어내던 꽃들, 깊은 우물, 수시로 바뀌던 아랫채 셋집 가족들, 아버지, 어머니, 1930년생 큰오빠부터 1959년생 막내 남동생까지 삼남사녀 일곱 형제들. 그들 중 둘은 이미 이 땅을 떠났다. 시댁의 삼남이녀 중 둘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중 한 명은 장남인 남편이다.
이 그림 한 폭에서 읽어내는 나의 서사가 길고도 아련하다. 부산에 가면 종종 옛날 집을 찾아가 본다. 너무나 변해 버린 주위 환경이지만 다행히 집터는 그대로 있다. 낮았던 담과 늘 열려 있던 대문 대신 높은 벽돌담과 꽉 닫힌 대문 앞에서 그대로 돌아서곤 한다.
언젠가 다시 가 본다면 그때는 문을 두드려 볼 상상도 해 본다. 사연을 말하면 집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대문 안도 송두리째 변했으리라.
변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것이 없어진 세상이다. 뿌리를 찾아 조용히 머물러 보고 싶은 곳, 추억이 깃든 고향이 사라졌다.
날로 화려해지고 높아지는 현대식 고층 건물들은 오래오래 남아 있을까? 남아 있은들 그 속에서 어떤 의미와 정취를 끌어낼 수 있을까?
부산 전시회장에서 우리 집으로 옮겨온 감나무 그림 한 폭에서 만나는 지나간 많은 시간들과 얼굴들.
그리움과 감사와 아쉬움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