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발견한 빛

우리가 이렇게 걸을 수만 있어도

by 서무아

우리가 둘레길에 찍어 놓은 발자국들 하나하나가 밤하늘로 피어오르는 꿈을 꾼다. 지상에서 반짝이는 것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우리는 아늑했다. 좋은 날이었다.

P 26.


우리가 함께 누릴 수 있는 날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이유 하나가 늘 우리 선택의 기준이 된다. 아이들은 금방 자란다. 어느새 훌쩍 자라서 제 갈 길을 찾아 떠난다. 그때 그래도 조금 덜 외로울 수 있게 지금 우리는 같이 다니는 것 같다.

P 88.


일곱 살 딸, 초등학교 3학년 아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어린 두 자녀가 아이스크림 먹는 재미로 3박 4일 간 제주 올레길을 걷는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아이가 자랐구나.'

그리고 꿈을 품었다.

'같이 걸으면 좋잖아.'


그로부터 4년 후인 2020년 5월 1일, 11살 딸 강이와 14살 아들 산이를 데리고 아내와 가족 네 식구가 지리산 둘레길 3코스로 둘레길 걷기의 첫 발을 내딛는다. 5년 후인 2025년 2월 5일, 지리산 둘레길 마지막 21번째 코스, 산동에서 주천까지를 걸어서 총 300km 둘레길 걷기를 완성한다.

2020년 4월부터 11월까지 부안 마실길 8코스도 다 걸었다.


딸 강이는 천식이 많이 좋아졌고 환절기마다 알았던 비염도 약해졌다.

이런 말도 할 줄 안다.

남자 친구를 테스트할 때 먼저 여기 와서 걸어야 한다. 하루를 같이 걸어 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다.ㅡ

아들 산이는 아빠가 잘못 인도한 길을 곧장 바로 잡아 줄 줄도 알게 되었다.

이쪽이 아닌 것 같아.ㅡ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길을 물어보고 두 번 세 번 돌아서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 줄도 한다. 저자는 그 둘이 같이 걸어 주며 부쩍부쩍 자라는 모습이 마냥 고맙고 예쁘다. 그래서 고백한다.

자식이 성장하는 것만큼 부모에게 의지가 되는 것이 없다.ㅡ

식구가 이렇게 다니니까 보기 좋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처음 지리산 둘레길 3코스를 걷던 둘째 날, 2020년 5월 2일, 이틀 동안 20km를 걸으면서 500m가 넘는 봉우리를 여섯 개나 지나왔다. 많이 힘들어하는 딸 강이에게 말했다.

우리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하니까 그만 내려가자.ㅡ

4학년 짜리 어린 딸이 말했다.

아니야, 이건 어버이날 선물이야.ㅡ

아빠는 마음에 새긴다.

ㅡ네가 있어서 좋다.

네 시간 걸려 7km를 걸었던 첫날, 저자는 잠들기 전 긴 일기를 썼다. 뿌듯했고 상쾌한 그 마음을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빈집처럼 세상을 걸었던 날들이 있었다. 혼자서 걷고 혼자 불을 켜고 자리 위에 누웠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는 이렇게 걷는 날을 상상하지 못했다. 아이들과 함께 걷는 날, 아들과 딸이 떠드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길이 세상에 있는 줄 몰랐다.

P 18.


네 가족이 1년에 겨우 두 번 정도 시간을 내어 어려운 긴 길을 함께 걷고 모든 기록을 남긴 것이 남다르다. 날씨가 궂어 걸을 수 없을 것 같으면 배낭 속에 각자 읽을 책을 한 권씩 넣고 출발한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브런치 작가, 강물처럼 님, 저자의 문장은 섬세하고 유려하고 서정적이다.


오늘 같은 날이 우리에게 얼마쯤 주어진 것일까? 그동안 내가 보낸 오늘 같은 날과 앞으로 남은 오늘 같은 날을 세어 본다. 과연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이것들은 그런 날일까? 오늘 같은 날에 우리는 여기 있고 같이 있다.

여기는 바람이 곧잘 불고 있다. 집에는 해가 났을까? 가을꽃이 많이 피었다. 살살 흔들리는 꽃들이.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서로 닮은 것들끼리 사이도 좋아 보인다. 산골에서도 벼가 잘 익어가고 있다.

산청은 지금 한참 약재 축제 중이다. 지리산 둘레길 6코스. 우리는 앞에 경호강이 흐르고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잠시 앉아 있다. 바람이 가을을 춤추고 있는 곳에 식구들이 앉아 있다. 하늘은 나른하고 강물은 유유하고 나는 평평하다. 가로수 그림자가 길게 무늬를 그리는 이 그림은 어디에 걸어둘까?

P 66.


늦게 부모가 된 편이라는 저자는 10년 전 암 수술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가족들에 대한 마음이 애틋하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 일곱 살 딸이 눈에 들어왔다. 8시간 자고 8시간 일하며 8시간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일상 속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 일기를 썼다.

허리도 좋지 않다. 자신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 가볍게 슬쩍 다루지만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새벽에 눈을 뜨면 하는 동작이 있다. 잠이 깨면 우선 가만히 있는다. 그대로 못 일어나기 때문이다. 맨 처음 발가락 끝에 힘을 준다. 종아리가 당겨지면서 허벅지, 허리로 의식이 차오르면 가슴께에서는 저절로 숨이 한번 쉬어진다. 옆으로 몸을 비틀고 몸을 비튼 반대쪽 손으로 바닥을 짚고 그야말로 슬로비디오로 일어난다. 그렇게 일어났는데 허리가 영 내 허리 같지 않는 날은 화장실에 가는 것도 살짝 겁이 난다. 양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거실을 서성거린다. 한 30분 걸린다.

출발 전, 새벽에 허리 상태가 평소보다 좋지 않은 날은 거실 바닥에 반듯하게 누워서 허리가 펴질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편백나무 숲에서 같이 밥을 먹다가도 울컥 오심이 올라오면 자리를 뜬다. 식구들은 씹던 것도 멈추고 눈동자도 멈춘다. 토할 수 있을 때 토하고 나면 속이 편해진다. 다시 밥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 번도 밥숟가락을 놓고 자리를 뜬 적도 없다. 아무렇지 않게 태연한 척한다.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아빠가 된다.

P 198.


체력도 많이 달린다.

둘레길 가다 현기증이 나면 눈꺼풀에 힘을 주고 몇 번씩 눈을 다시 떠가며 앞에 있는 것을 바로 보려고 한다. 그래도 소용이 없으면 눈을 감고 조금 더 어지러우면 10분만 잔다고 부탁한다. 눈을 뜨면 10분 전 내가 봤던 세상이 아니다. 색깔도 하늘도 달라져 있는 것을 언제나 목격한다. 세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던 길 가자고 바지를 털면서 일어난다. 그렇게 스틱을 하나씩 나눠 들고 마스크를 쓰고 걸었던 2022년 3월 1일이었다.

P 55.

풍경이 되는 곳에서는 잠깐이라도 머문다. 언제 여기를 다시 올 수 있겠냐는 한 마디면 다들 끄덕인다. 거기 앉아서 우리는 또 무엇을 재잘거렸을까? 바람이 불지만 이렇게 모여 있으니까 춥지 않다. 저기 바로 보이는 마을이 가장 마을이야. 이제 정말 다 왔다. 걸음만큼 신기한 것이 있을까? 겨우 30cm가 될까 싶은 그 한 걸음으로 여태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그 신기한 것이 신비로 변하는 곳이 우리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모르겠다. 우리가 얼마나 걷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길을 다 걷고 나면 우리도 믿기 힘든 신비를 꺼내 놓을 것이다.

P 57.


책 뒷부분에서 무심한 듯 살짝 던져 놓은 허리 통증에 대한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아내도 큰 수술을 받았다. 경사진 코스를 걷다가 온 날이면 수술받은 부위가 당긴다며 사나흘 고생한다. 저런 일상 속에서 이런 일을 해내었구나.


그는 말한다.

우리가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 그때까지가 이 영화의 러닝타임이다. 그 속에 담긴 진정성은 귀하고 값진 삶이 빚어 놓은 보석이다. 너희는 어떤 것을 놓아주고 어떤 것을 남겨 놓을까? 그리움이란 말은 언제쯤 알게 될까? 아빠도 엄마도 이렇게 시원하게 걸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그동안 병원에 다니고 누워 지내고 이래저래 많이 무거웠는데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 같다. 창문을 다 열어 놓고 집 청소를 싹 해 버린 거 있지 그 기분이야. 잘 기억하면 그게 희망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을 잘 보관했다가 꺼내는 일, 그게 우리에게 필요했던 거야. 사람에게는 희망이 필요해. 내가 오늘 새로 쓴 희망은 이런 거다. 진짜 희망은 안과 밖이 편안한 것.

P 208~209.


바람 따라 우리가 걸었던가? 바람이 우리를 따라 날았던가? 이 자연이라는 한 바구니에 담겨 그네를 탔다. 파도에 철썩이고 바람에 흔들리고 아이들이 지저귀고 더 이상 마실길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P 218.


매번 현재의 소중함에 집중하기 위해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불러내는 철학적 사유의 행위, 가족과 함께 정성껏 마음먹고 행하는 길 걷기는 정성을 다해 일상을 살아내는 한 가족의 사랑의 실천이었다.


ㅡ너희와 걷는 것이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전부구나.ㅡ

ㅡ 아프다고 병원에나 다니고, 누워만 있었다면, 애들한테 아무것도 해 준 것 없이 달랑 세월만 갔을 것을 생각하면 끔찍해.ㅡ

엄마, 아빠, 부부가 주고받는 대화 속에 <걷기에 행복하다>는 책 내용이 다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