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이리 멀리 왔을까?
또다시 새로운 숫자와 익숙해져야 한다. 2026년.
2026년 1월 1일, 11시 교중미사. 다시 돌아온 방배4동성당. 낯익은 곳에서 올 한 해를 새로 시작한다.
새 출발의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는 숫자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기도 한 신년미사는 어젯밤 묵직한 반성과 감사로 채워진 송년미사와 달리 상큼한 희망의 색을 띠고 밝고 활기차게 봉헌된다.
본당 사성부 합창단 성가대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빠르게 성체묵상 특송을 연주한다. 교우들의 경건한 침묵 속에서 아름답고 고운 목소리는 날개를 달고 천상으로 가벼이 날아올랐다.
다음날 새벽미사에서 성가대원에게 물어 알게 된 제목은 <알마 레지나>. 라틴어이며 그 뜻은 '자애로우신 여왕님이시여'라고 한다.
공지사항까지 다 끝나고 성당을 꽉 메운 신자들이 부산스럽게 소지품들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급습하듯 귓가로 날아드는 맑고 밝은 합창 소리.
윤극영 작사, 작곡 <설날>. (1924년)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는 내가 드리고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 받기 좋아하셔요
일제히 고개를 들어 위층 성가대석을 올려다본다. 환한 얼굴 가득 웃음을 담는다. 경쾌하고 밝은 멜로디가 성당 가득 행복을 수놓는다.
가만히 그대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전, 어린 시절의 설날 풍경 속으로 아련히 빠져든다. 고모가 안 계시고 아들만 다섯이었던 오 형제의 장남, 아버지. 손 크시고 부지런한 맏며느리, 어머니. 삼촌 숙모들이 사촌들과 함께 모두 우리 집으로 모여들고 추운 마루 끝에서 제사가 모셔진다. 숙모들과 사촌들은 그 전날부터 우리 집을 들락거리고 우리 어린 형제들도 사촌들과 어울려 근거리에 모여 사는 삼촌댁들을 드나든다. 대문들은 항상 다 열려 있다. 구석진 방에 굴러다니는 만화책도 보고 군것질 대접도 받는다.
성인이 된 사촌 오빠는 팔을 걷어 부치고 철썩철썩 찰떡 찧는 일을 돕는다. 뒷마당 한 귀퉁이에 빗물 고여 얼음 얼어 있는 돌절구확이 깨끗이 씻기고 그 속으로 김이 풀풀 나는, 금방 쪄낸 찹쌀 고두밥이 들어간다. 오빠가 높이 높이 절구를 들어 올려 힘차게 내려친다. 같이 소매를 걷어 부친 어머니의 재빠른 손놀림도 쉬지 않고 절구확을 드나든다. 매번 찬물에 손을 적셔 가며 옆으로 삐져나오는 찹쌀 덩이를 절구가 떨어지는 중심 위치로 쏘옥쏙 밀어 넣는다. 장단이 척척 맞다. 일 년에 열 번 모시는 제사, 한두 번 해 보는 일이 아니다.
큰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숨 죽이고 지켜섰는 우리들의 눈에는 신기한 어른들의 세계다.
드디어 커다란 한 덩이로 변한 찹쌀 뭉치가 미리 준비해 둔 넓은 알루미늄 쟁반 위의 노오란 콩가루 위로 부려진다. 어지간히 식은 찰떡 뭉치를 콩고물 입혀 가며 사각으로 떡 모양을 잡는다. 고소한 콩고물 냄새가 사방에 퍼진다. 펼치면 오므라들고 펼치면 오므라드는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다. 마침내 꾸덕꾸덕해지면 쓱쓱 썰어져 간혹은 제 모양 그대로인 찹쌀 밥알이 꼬들꼬들 씹히는 노란 찰떡으로 완성된다. 차곡차곡 노오란 대바구니에 쟁여져 고방으로 옮겨질 것이다.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우리들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이 없을 리 없다.
부엌방 구들목에는 커다란 대야 위에 걸쳐 놓은 나무 막대기 두 개 위에 길다란 옹기 단지가 물기 머금은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있다. 곁을 지나다니는 식구들마다 대야 속에 놓여 있는 바가지로 듬뿍듬뿍 인심 좋게 물을 끼얹어 준다. 그 아래로 노란 콩나물과 하얀 숙주나물이 봉긋이 고개를 내밀고 솟아오른다. 아무 변화가 없어 보이는 처음 며칠이 지겨울 뿐 하루가 다르게 부피가 늘어난다. 옆 단지에서는 술이 익어 가기도 하고.
열어젖힌 커다란 나무 부엌문 가득 하얀 김이 풀풀 새어 나오던 흙바닥 부엌, 커다랗게 걸려 있던 무쇠 가마솥, 그 밑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 언니랑 어머니가 가마니 깔고 앉아 짚에다 빨간 벽돌가루 묻혀 반짝반짝 광을 내던 무거운 놋그릇들, 종종걸음 치시던 어머니의 뒷모습, 왁자지껄 몰려다니던 우리들.
방앗간 앞 골목길, 긴 줄 서서 불린 쌀 담긴 대야 옆에서 떡 순서 기다리고, 가게에 잔심부름 다녀오고, 뻥이야~! 쌀 튀기는 줄 서고, 밤에는 언니들이랑 둘러앉아 꾸덕꾸덕 굳어진 떡국가래를 하염없이 썰고 ᆢ .
참 추웠던 마당과 우물가와 방문을 열 때마다 몰려드는 한기. 그 속에서 옹송거리면서도 바삐 움직였던 어른들로 그득했던 그 시간들이 이제는 까마득한 전설처럼 멀리 묻혀 사라졌다. 하늘나라로 옮겨 가신 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모두들 평안하시지요?
덕분에 저희들도 잘 지냅니다.
가슴 한 귀퉁이로 서늘한 강물 한 줄기가 흐른다.
온전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빛 속에서 영원평강 누리소서.
저녁에는 시댁 행사가 있는 둘째네는 빠지고 첫째네랑 아들네랑 뭉쳤다. 동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꼬마 아가들과 정신없는 식사를 하고 집으로 와서 과일, 차를 함께 나누었다.
엄마 아빠를 따라온 대학 신입생 첫 손녀의 의젓한 얼굴도 오랜만에 반갑게 만나고, 젊은 두 부부들의 활기찬 대화도 듣고, 2026년 1월 1일이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