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우리들이ᆢ

멀리서 응원을 보냅니다

by 서무아

어느덧 72세, 75세, 80세, 85세가 된 우리 넷, 40년 지기 이웃사촌. 내가 제일 막내이고 세 분은 나에게 형님이 된다.

38년 전인 1988년 4월, 대지가 채 50평이 안 되는 조그만 2층, 골목 코너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두 딸들은 초등학교 1학년, 5학년이었고 두 달 후인 6월에는 막내가 태어났다.


아래층으로 D 형님이 이사를 와서 한복집을 차렸다. 그 무렵 불의의 사고로 남편분을 떠나보낸 M 형님은 중, 고등학생 두 남매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성당 반장을 맡고 계셨던 L 형님은 우리들 모두를 알뜰히 챙겨 주셨다. 그때의 우리들 나이는 34세, 37세, 42세, 47세였다. 한 동네 성당 교우들끼리의 연대감이 강했다.


우리 집 한 집 건너, 나보다 한 살 많은 하얗고 어여쁜 자매 A는 2년 여의 위암 투병 끝에 초등학생 두 남매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 남편은 1년도 채 안 되어 젊은 처녀 아내를 들였다. 아내의 투병기간 동안 이미 사내 연애 중이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A 씨의 장례식 날, 사람들과 떨어진 외진 곳에서 혼자 고개를 젖혀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두 눈에 고인 눈물을 감추는 젊은 그를 우연히 보았다. 그아픔이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남편과 함께 세탁소를 운영하며 성당 반장을 맡아 누구에게나 선하고 친절했던 자매 B 씨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정치적 문제로 오랜 실직 생활을 겪었던 남편이 제약회사 기자로 복직되었다는 희소식 끝에 당신이 유방암에 걸려 고통을 겪다 세상을 떠난 C자매님도 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교우들은 한마음이 되어 매일 오전 10시에 그 집에 모여 54일 묵주 기도를 마치곤 했다. 우리 집 막내아들은 포대기에 싸여서 옆에 누워 있다가 점차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고 나중에는 기도 촛불 끄는 당번역을 맡아가며 유아원에 다니기 전까지 수년에 걸쳐 내 옆자리를 지켰다. 형님들은 그런 우리 아들을 많이 귀여워해 주셨다. 지금도 그때 그 모습을 종종 추억 속에서 불러내와 이야깃거리로 삼으신다. 입시 때마다 기도도 많이 해 주셨다.

"바오로, 잘 있어?"

통화 때마다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 오셨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내가 함안살이 2년을 하는 동안에도 서울에서 함안까지 편도 4시간 30분 걸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1박 2일 세 분이 다녀가셨다. 성심성의껏 접대해 드리고 한 곳이라도 더 보여 드리려 촘촘히 식단을 짜고 일정을 점검했다. 남편이 승용차 기사 역할을 맡아 많이 도와주었다. 벌써 8년 전 일이다.


그 후 내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 1년에 두세 차례, 마치 고향 친척을 찾는 듯한 심정으로 허물없이 만나 온갖 일상을 공유하며 감동과 지혜를 나누어 왔다.

제일 연장자이신 M 형님의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2024년 여름 어느 날, M 형님이 긴 카톡을 올리셨다. 당신은 이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니 신경 쓰지 말고 셋이 만날 수 있을 때 자주 즐겁게 만나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일제히 답글들을 올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형님이 힘내어 열심히 회복하셔서 꼭 같이 만나야 한다.ㅡ


그 해 연말인 2024년 12월 30일 오후 6시, 저녁 식사 거리를 사 들고 셋이 형님 집으로 찾아갔다. 늦은 시간까지 식탁에서 얼굴을 마주 대고 추억들을 나누었다. 다음날 형님은 이런 글을 올렸다.

ㅡ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 보니 무척 기뻤습니다. 얼굴 한번 보기가 이렇게 힘드니 앞으로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건강해질 일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하루가 소중한가 봅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상태라 편안합니다. 하느님께 가는 과정이 왜 이렇게 힘들까 두려워집니다. 건강들 하시고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ㅡ


두 차례에 걸쳐 양쪽 고관절 수술을 받은 형님은 살금살금 집안에서 지팡이를 짚고 일상을 유지하며 외출을 삼가셨다.

올해 초, 2026년 1월 13일, M 형님 댁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에서 만나기로 어렵게 약속을 잡았다. 그 전날 비밀 작전을 짰다. 처음부터 우리 집에 오시자고 하면 멀다고 아예 엄두를 안 내실 테니 내일 모임 장소에서 무조건 택시를 타고 우리 집으로 오시기로. 약속장소에서 그 계획을 알게 된 M 형님은 처음에는 난처해하셨지만 우리들의 강력한 설득과 권유로 세 분은 택시를 타고 우리 집으로 오셨다.


따뜻하고 조용한 집에서 우리들만의 소박한 집밥 점심을 먹고 편안한 자세로 후식과 차를 즐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넉 달 전, 84세의 남편을 떠나보내신 L 형님의 후일담, 수십 년 정성껏 다녔던 새벽 미사를 이제는 접어야 되는 M 형님의 회포, 며느리 우울증 극복 과정을 함께하며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인 자식사랑 순애보의 주인공, D 형님의 눈물 나는 경험담.

매주 금요일, 명동 노숙자 점심 대접 봉사로 4시간 동안 설거지를 하며 며느리를 위한 기도를 바치셨다고 한다.

ㅡ하느님, 이것은 제가 아닌 제 며느리 ㅇㅇㅇ가 바치는 봉헌입니다. 버리지 말고 지켜 주시고 치유해 주십시오.ㅡ


D 형님으로부터 며느리의 우울증으로 인한 고통을 전해 들은 M 형님은 바로 54일 묵주 기도를 바치며 많이 울었다고 하셨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두 형제가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가 없는 가정에서 자라야 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이제 힘든 어두움을 지나온 젊은 그들은 열심히 두 아들들을 키우며 가정을 잘 지키고 있다.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내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가슴속에 꼭꼭 묻어 두었던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울고 웃으며 격려하고 칭찬하는 치유의 시간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하룻밤 날을 새야겠다는 웃음을 남기며 M 형님이 말씀하셨다.

"좋은 시간을 보내서인지 다리도 더 가벼워진 것 같애."


세 형님들을 카카오택시에 태워 보내 드리고 집으로 들어오자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D형님의 아들이다. 우리 아들의 형 노릇을 하며 아래 위층에서 같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늘은 택시에 핸드폰을 두고 내린 어머니, D형님의 전화를 수소문 끝에 찾아서 해결한 효자 아들이다.

"집에 가 보니 엄마가 아직 안 오셨어요. 언제 출발하셨나요?"

"어머니 조금만 더 있으면 도착하실 거야. 옆에서 엄마 잘 보살펴 주어서 고마워.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