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ing

"엄마하고 코 잘래"

by 서무아

새벽 어스름 속, 이미 잠에서는 멀어졌지만 따뜻한 잠자리 속에서 조용히 휴식을 즐긴다. 아들네 집 손주방. 옆에는 이불도 덮지 않고 마음대로 굴러다니는 손주가 잠들어 있다. 연신 '잠이 안 와.'를 외치다 자정을 거의 다 채워서 꿈나라로 간 2년 4개월짜리 아가다. 이젠 어느덧 아가라기보다 어린이에 가깝게 물씬 커버렸다. 지난 1년 어린이집도 자알 다녔다.


토요일 아침, 격주 토요 근무인 며느리가 오늘은 휴무라고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아침을 늦게 열어야 한다. 갑자기 옆에서 소리가 난다.

"안 잘 거야."

억양으로는 단호한 선언이지만 목소리는 달콤하고 앙증맞다. 장난으로 계속 이 말을 반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든다. 녀석도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는 몇 번이고 말해 줄 것 같다.

"안 잘 거야."

조용히 어둠 속을 더듬어 본다. 밤새 길 밝히던 가로등 불빛이 점차 힘을 잃고 희부연히 밝아오는 새벽빛이 커튼을 뚫고 들어 온다. 방안은 점점 환해지는 중이다. 저만치 등을 보이고 옆으로 누워 콜콜 자고 있는 녀석의 등이 제법 튼실하다. 언제 그런 잠꼬대를 했는지 알 바 없다는 듯 쌔근쌔근 고운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꿈에서조차 안 자겠다고, 잠이 안 온다고, 조금이라도 더 놀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모양이다. 두 살 터울 누나로부터 말을 빨리 배워 문장 형태를 갖춘 말을 꽤 잘한다. 일주일에 하루 와서 함께 자는 할미로서는 미처 알아듣지는 못하는 말을 누나인 손녀는 잘도 알아듣고 둘만의 대화를 곧잘 이어간다. 대견스럽고 신기하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려서부터 관계를 익히고 연결을 배워 가는 모습이 평화롭다.


밤새 기저귀를 갈아 주고 시간 맞춰 우유를 먹이던 시간은 어느새 저만치 뒤로 물러가고 이제는 제법 의젓한 주관을 가지고 말로 자기 뜻을 표현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 든다. 꽤 늦어진 밤에 제일 많이 쓰는 말은 두 가지다.

"안 잘 거야."

"잠이 안 와."

그럴 때 어른들이 내미는 카드가 있다. 손주의 양 옆에 할머니와 엄마가 누워 엄마가 책을 읽어 준다. 조명은 최대한 낮춘다. "잠이 안 와."를 연신 중얼거리며 손주는 잠 속으로 빠져든다. 며느리는 살그머니 일어나 누나와 아빠가 있는 안방으로 건너간다. 내일 아침 천천히 편안하게 일어날 것이다.

자다가 잠을 깨어 칭얼거리면 기저귀도 갈아주고 로션도 발라주며 다시 잠재우던 단계는 조금 지났다. 잠결에 칭얼대며 보채는 요구 사항이 바뀌었다.

"엄마하고 코 잘래."

잠들기 전 분명히 옆에 있었던 엄마가 없다. 유달리 챙기고 따르는 할머니가 계시지만 엄마가 더 좋다. 손주가 잘 컸다. 엄마를 찾고 엄마를 옆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한 마음이 된다.

'잘 크고 있구나.'

'그래, 엄마하고 코 자는 게 얼마나 좋아.'

이젠 단순한 생리적인 욕구보다 한 단계 높은 정서적인 욕구가 더 중요한 때가 되었나 보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귀가하시는 주말, 일주일에 한 번 함께 자는 할머니보다 퇴근해 오는 순간부터 진심을 다해 다정하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엄마가 손주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고 보살핌 받고 싶어 하는 대상이다. 자다가 선잠을 깨어 칭얼거리며 반복하는 말,

"엄마하고 코 잘래."

울음기 섞어 내뱉는 이 일곱 자가 내 마음에 애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그래, 엄마하고 자야겠구나.'

이런 일이 2,3주 반복되었다. 며느리와 아들에게 말했더니 선선히 받아들인다. 며느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손주방에서 엄마 양옆에 누나랑 손주가 같이 누워 자기로 했다. 자연스러운 결말이다. 두 장밖에 없던 매트형 요도 하나 더 구입하여 나란히 석 장을 깔았다. 2년 4개월 간 거의 매주말마다 열심히 드나들었던 아들네 집. 이제는 손주 잠당번도 접어야 할 때인가 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 인간사의 만고 진리다. 육체적으로 조금 벅찼던 나도 편안해지고 단단한 생각이 자리 잡아가는 손주도 행복해지고 따뜻한 눈으로 아기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엄마도 더 많은 사랑을 키워 갈 것이다. 할미로서 손주의 밤 시간을 맡았던 바통을 넘겨주어야 할 때이다. 순조로운 권력 이양이 이루어졌다. 손주와 며느리에게 좋은 일은 손녀에게도 아들에게도 다 좋은 일이다.


Timing.

이제는 다른 모습의 건강한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시간이다. 세월이 가고 시간의 강을 건넌다. 세월의 흐름에 몸을 싣고 물결 따라, 물살에 몸을 띄우고 조용히 주어진 물길을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