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세월을 뛰어넘은 데이트
이틀 전 며느리의 전화를 받았다. 모레 토요일 오전 8시까지 와 주실 수 있겠냐고. 늘 그렇듯이 밝고 매력적인 목소리다. 젊음은 참 좋다. 7시 반까지 가겠다는 대답을 했다. 아이들의 일은 0순위이다.
오늘은 며느리가 출근하는 토요일. 디디딕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자 엄마를 따라 이미 깨어 있었던 손주가 반갑게 달려와 안긴다. 냉장고 속 달걀과 치즈, 잼, 야채들을 꺼내어 식빵 반 쪽짜리 두툼한 샌드위치 하나를 준비했다. 며느리의 아침 식사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두 남매와 출근하는 엄마의 이별 의례가 요란하다. 안아 주고 뽀뽀해 주고 하이파이브를 한다. 마주치는 하이파이브 손바닥이 찰싹 딱 맞게 맞춰지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해야 한다. 한 번, 두 번ᆢ. 1초가 급한 심정일 텐데 며느리는 용케도 웃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두 아이의 요구를 다 받아 주고서야 현관문을 나선다. 볼 때마다 참으로 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같으면 엄마가 바쁘다며 아이들 마음까지는 헤아려 주지 못했을 텐데 ᆢ. 반듯한 젊은이들의 가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배울 점이 참 많다. 뒤이어 일어난 아들도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이제는 손주들 차례다. 딸기만 먹는 손녀, 넙죽넙죽 주는 대로 받아먹다가도 뭔가 아니다 싶으면 그대로 뱉어내는 손자. 주양육자가 아니니 아가들이 원하는 대로 거의 맞춰 주는 것이 상책이다.
안 먹겠다면
"아, 그래?"
먹겠다면
"그래, 좋아!"
아침 식사도 설거지도 다 끝났다.
오늘은 둘의 손을 잡고 집에서 조금 떨어진 서래마을의 문방구로 걸어서 가 볼 작정이다. 승용차로만 움직여 온 아가들에게는 조금 모험이다. 안아 달라는 응석에는 내 등에 매달려 있는 백팩이 큰 방패막이가 된다.
"할머니 이 가방 무거워서 못 안아 줘, 할머니 힘들어^^."
8차선 신호등도 잘 건너고 인도도 잘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하 1층에 꽤 넓은 면적을 가진 문방구에는 별의별 것들이 다 많다. 문방구뿐 아니라 장난감들도 꽤 있다. 어린 손님들을 유혹하기에 손색이 없다. 꼭 한번 구경시켜 주고 싶었던 곳이다.
미리 약속한 대로 꼭 필요한 것들만 골라 보자는 말이 떨어지자 플라스틱 비눗방울 제조기를 제일 먼저 손에 든다. 다양한 디자인을 이것저것 살펴보더니 서로 다른 것을 하나씩 골랐다. 그다음은 스티커다.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각양각색의 스티커들 앞에서 눈길을 돌리지 못하는 손녀. 그 옆에서 동생인 손자도 덩달아 호기심을 보인다.
누나가 일사불란하게 지시한다.
"나는 이것, 이것."
"너는 요것, 요것."
동생은 단호하고 야무진 누나의 선택권을 별말 없이 그대로 따른다.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다. 몰캉몰캉 손 안에서 조몰락거리는 진드기 공도 놓치지 않았다.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긴 아이쇼핑 끝에 꼭 필요한 두세 가지만을 사기로 한 약속이 잘 지켜졌다. 계산서에는 2만 600원이 찍혔다.
계산대 앞에서 손녀가 앙징스러운 목소리에 애교를 가득 담아 말한다.
"사고 싶게 만드는 게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억지 부리지 않고 할머니와 잘 타협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한껏 담긴 말이다. 더 골라 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이번에는 내가 참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꽤 걸어야 한다. 다행히 날씨는 그리 춥지 않다. 복장과 신발도 제대로 갖춰졌다. 비눗방울 놀이가 급하다. 문방구 지하계단을 올라오자 마침 건물 옆 공터가 있다. 주차장인 듯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을 뿐이다. 두 녀석은 비눗방울 장난감을 꺼내 신나게 논다. 그것도 잠시, 발 밑에서 졸졸졸 소리를 내는 하수구 아래로 흐르는 물에 정신을 뺏긴다. 역시 생명력 있는 많은 것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들에 끌리는 모양이다. 다시 집을 향해 갈 길을 재촉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는 길에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손녀가 관심을 보였던 음식점 앞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다. 소리, 냄새, 촉감, 모든 것이 예민하고 빠른 손녀가 다시 말한다.
"할머니, 맛있는 냄새가 나요."
전주콩나물국밥집 앞이다. 마침 점심시간이 다 됐다. 두 녀석 손을 잡고 국밥집 문을 열었다. 직장인들이 없는 토요일인 때문일까, 널찍한 실내가 그리 붐비지 않는다.
세 살, 다섯 살, 두 아가들과 할머니가 4인석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8,000원짜리 국밥 하나를 주문했다. 눈을 빛내며 연신 종알거리는 호기심 천국 아가 손님들. 의젓하고 예의 바르게 자리를 지키며 음식을 기다렸다. 뜨거운 뚝배기 국밥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국자를 부탁하고 가위를 청해도 친절하게 응대해 준다. 귀여운 아가손님들에게 베푸는 특혜다. 옆에 놓여 있는 개인 접시를 두 개씩 차지하고 차례로 식혀 가며 콩나물국밥을 먹는 두 녀석들. 콩나물을 잘게 잘게 자르고 뜨거운지 아닌지 살펴 가며 두 녀석 밥 먹이기에 집중한다. 국밥 속에 들어있는 대파 조각들을 건져내야 하나마나를 걱정하고 있는데 손녀가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할머니, 저 파도 잘 먹어요." 안 먹는 게 먹는 것보다 더 많은 손녀가 식혀 주기 바쁘게 국밥을 오물오물 잘도 떠먹는다. 동생도 누나를 따라 쉽게 쉽게 그릇을 비운다. 이 말을 전해 들으면 며느리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ㅇㅇ가 파를 먹었어요?"
난생처음 먹어 보는 전주콩나물국밥.
난생처음 들어가 본 문방구.
난생처음 걸어본 동네 길.
아파트 놀이터에서 다시 비눗방울 놀이가 시작되었다. 대단한 행위예술이 펼쳐진다.
오후 3시가 다 되어 귀가한 며느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며 현관문을 나섰다. 배꼽 인사하는 두 녀석과 힘차게 하이파이브를 맞추고 돌아섰다.
2026년 28 2월 28일.
오늘 하루의 성공적인 육아 일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