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컬레이터도 탔어요
방학~!
아이들에게는 반가운 말, 일하는 엄마들에게는 끔찍한 말이다. 세끼 돌밥(돌아서면 밥)과 하루 종일 집에 머무는 두 아이들의 넘쳐나는 에너지와 쏟아지는 요구 사항이 버겁다.
한 끼 식사를 비롯해 하루 여섯 시간 남짓 육아를 맡아 주던 어린이집이 방학에 들어갔다. 이른바 봄방학.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시지만 하루 종일 두 아이를 맡기기에는 마음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이틀은 며느리가 휴가를 쓰고 하루는 외할머니와 이모외할머니가 도우시고 나머지 하루는 내 당번이 되었다.
11시경 도착하니 아주머니는 벌써 아침 청소까지 끝내고 거실에서 손녀랑 풍선 배구 놀이 중이다. 동생인 손자는 빨간 플라스틱 뿅 망치를 들고 이 방 저 방 마구 뛰어다닌다. 어린이용 한글 학습 TV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아이아맨이 휘두르는 정의의 무기, 뿅 망치. 하도 두드려 대니 플라스틱 망치가 뭉개져 두 개째 새로 구입한 것이다. 소꿉놀이, 아이스크림 장수 놀이, 퍼즐 맞추기, 레고 블록 조립ᆢ, 정리해 놓은 장난감들이 눈 깜짝할 새 거실 바닥에 쫘악 깔린다.
아주머니가 준비해 주신 말랑말랑 쫀득쫀득 떡국 점심을 먹고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목적지는 우리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지하철로 1 구역.
하지만 현관을 나서는 것부터 만만치 않다. 이리저리 나부대는 애 둘을 붙들어 어찌어찌 옷을 갈아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끊임없이 주의를 주며 밀착 보살핌을 한다. 드디어 어른 둘과 아가 둘이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목. 반짝, 손녀의 조그마한 머릿속에 방앗간이 떠올랐다. 가는 도중에 있는 코끼리 놀이터다. 아파트 내에서 손녀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터다. 그곳에서 한참을 놀았다. 목적지보다 바로 눈에 띄는 방앗간이 더 중요하다. 허기가 조금은 메꿔진 것일까? 다음 행선지로 마음을 돌린 참새들과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계단을 이용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하나, 둘, 셋, 구령과 함께 잡은 손에 힘을 주면 잘 따른다. 구령에 맞춰 에스컬레이트에 발을 얹고, 바닥에 발을 내린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넷 중 셋은 무임승차다. 출퇴근 시간대가 아닌데도 제법 복잡한 지하철. 한 구역이니 모두 씩씩하게 서서 간다. 도착역을 빠져나와 드디어 할머니네 아파트 놀이터에 도착했다. 재개발 아파트 단지가 기부 채납한 부지에 서울시가 지은 큰 규모의 놀이터다. 놀이터 중간 부분이 넓은 연못처럼 푹 파여 있다. 그 안에 미끄럼이랑 흔들그물망 다리 등 여러 놀이 기구들이 있다. 여름이면 그곳에 물을 채운다고 한다. 어린이들의 피서장.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된다.
경사면 위로 뛰어올라 그네도 타고 도로 내려와 미끄럼도 올라가 보고 나무 징검다리도 건너 본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잘도 논다. 더 어린 아가들도 여남은 명 보인다. 아이들이 향하는 곳마다 어른들은 졸졸 뒤따라다니며 눈길을 떼지 못한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두 남자아이들이 놀이터 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 단단히 차려입었고 자전거도 바퀴가 두툼한 게 승차감이 좋아 보였다. 놀이터의 움푹 파인 경사면을 신나게 오르내린다. 점점 속도가 붙는다. 마치 보드 스케이트를 즐기는 스포츠맨들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진하는 아가들이 아슬아슬하다.
"얘들아, 위험해. 여기서 그러면 안 돼~!"
아이들은 자전거 속도를 확 떨어뜨렸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않는다. 천천히 달리며 저쪽 건너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젊은 여자 한 명이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다. 엄마인 모양이다. 긴 생머리에 롱다리를 한 젊은 멋쟁이다. 그녀 앞에 아이들이 잠깐 머물더니 또 자전거를 탄다. 속도가 줄었다 늘었다 한다.
여자 앞으로 갔다.
"위험하지 않아요? 여기서 자전거 타는 것."
"자전거 금지라는 팻말이 없어요. 바로 앞에 있는 공원에는 자전거 금지 팻말이 있어요. 아이들이 여기 말곤 자전거 탈 곳이 없어요."
"넓고 한적한 아파트 둘레 인도도 있잖아요?"
"위험해서 안 돼요."
"어린 아가들이 노는데 너무 위협적이지 않아요?"
"나는 우리 아이들을 믿어요. 조심해서 사고 안 낼 거예요."
"금세 스피드에 빠지게 되는데 너무 위험해요."
"사고가 나면 책임질 거예요."
"어떤 책임요? 돈요?"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말했다.
"우리는 법조인이에요."
아니? 이건 또 무슨 말?
옆에서 아이들은 나름 속도를 늦췄지만 계속 자전거를 탔다. 금지 팻말이 없으니 타도 된다? 할 말을 잃은 나는 사태를 개선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영 씁쓸하다. 몇 걸음 옮기다 돌아서서 다시 그녀 앞에 섰다.
"우리도 법조인이에요. 의사도 있어요."
나도 참 웃기는 할머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ᆢ.
여자의 표정이 마치 반가운 동료라도 만난 듯 순간 환해진다.
"몇 년 안 지나면 아이들이 자전거 탈 만한 곳이 없어 안타까워하실 거예요."
참 순진한 건지, 뭘 모르는 건지, 내가 그 자리를 떠나자 아이들과 함께 여자도 그곳을 떠났다.
유모차를 몰고 있던 아주머니, 네댓 살 손녀를 지켜주던 할머니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정말 위험했어요."
"어제는 까딱하면 유모차에 부딪힐 뻔했어요."
그럴 때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성숙한 문화가 잘 없다. 뒤에서 쑥덕거리거나 목청 높여 삿대질을 하는 광경에만 익숙하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계속 머물려는 아이들을 다독여 집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한 끼 저녁을 먹일 정도의 먹거리들이 있었다. 아주머니랑 아이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중, 아예 우리 집으로 퇴근한 며느리에게도 얼렁뚱땅 소박한 집밥 저녁을 대접했다. 집으로 가는 엄마 차 속에서 잠에 빠진 아이들은 그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아주머니 핸드폰 앱에는 6,800보가 찍혔다니 어른들보다 훨씬 나대고 보폭이 좁은 아가들은 2만 보는 족히 뛰고 걸었으리라.
9시 30분, 퇴근길에 잠깐 들른 아들도 아직 식사 전이었다. 남아있는 음식들로 저녁 끼니를 때우고 귀가했다. 밤이 꽤 늦었다.
2026년 2월 26일(목).
아가들은 또 오늘 하루치의 몫을 쑥쑥 잘 자랐으리라.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다 뒤늦게 반짝 떠올린 말.
"당신 집 안방에는 자전거 금지 팻말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