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역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이 역을 이용해야 하는 아산병원이 대규모 종합병원이다 보니 문상을 하기 위해 한두 번 다녀갔을 테지만 그것조차 기억에 희미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 역이 나와 아주 친해졌다. 넉 달 전인 2021년 2월 19일, 남편의 암 진단 소식을 듣게 되면서부터이다. 그 소식은 너 나 할 것 없이 주위 사람 모두를 아연실색케 했다. 큰시누이는 말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ᆢ. 그 누구보다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사람이 아닌가? 규칙, 규칙, 규칙 준수에 최우선 가치를 두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본인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 모두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아들은 바로 아산병원으로 결정했다. 충격과 근심으로 잔뜩 긴장하여 항암이니 방사선이니 후유증, 식사 회복 요법 등등 온갖 낯선 단어들로 가득 찬 여러 전문가들의 설명을 들으며 이곳저곳을 찾아다녀야 하는 크고 복잡한 병원. 친절한 직원들과 신뢰감 가는 시스템과 실력 있는 의료진들이 갖추어져 있어 고마운 병원. 그 병원을 오가는 길이 잠실나루역이다. 종합검사를 위한 1주일 간의 입원을 포함하여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 등을 거치며 나는 스무 번 정도, 남편은 쉰 번 가까이 이 길을 오가게 되었다. 불과 넉 달 동안.
다행히 2호선 서초역을 이용하기 위해 10여 분 걷는 반포대로의 인도는 꽃과 나무로 잘 가꾸어져 있어 쾌적하다. 바로 옆 8차선 차도에는 차량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지만 도심답지 않게 저층 관공서들이 자리 잡고 있어 시야는 녹색 일변이다. 잠실나루역에서 내려 병원까지 가는 길도 상쾌하다. 둑 양옆의 둘레길은 초록으로 풍요롭다. 병원으로 향하는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 준다. 역 바로 앞에 병원 셔틀버스가 항시 대기 중이지만 거의 걷는 쪽을 택한다. 잠실 고등학교를 지나 성내천을 낀 산책로를 걸어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병원의 서관에 도착한다. 동관과 신관으로 죽 이어지는 거대한 크기의 병원은 항상 넘쳐나는 인파를 품어 안고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위용을 떨치고 있다. 병원에서 처방 내린 7주 간의 항암, 방사치료 과정과 검사를 거쳐 지금은 7월 12일에 있을 수술을 앞둔 한 달간의 휴식 기간이다.
오늘 또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잠실나루역에 서 있다. 오늘은 혼자다. 같은 아파트에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쓰던 아들네가 이곳 잠실로 이사를 한 날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산병원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아빠의 수술과 입원 시에 큰 도움과 의지가 될 것 같다.
2월 말 경 며늘아기의 임신이 확인되었다. 결혼한 지 3년 되는 해이다. 친정이 있고 근무지와도 가까운 잠실로 이사하기를 희망하여 계획하고 이루어진 일이다.
많은 재활용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고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아들네 부부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사에 따르는 온갖 일들을 오손도손 잘 처리해낸다. 어리게만 생각되던 아들이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에서 가장으로서의 믿음직한 분위기가 설핏 배어 나오기도 한다.
이제 아빠 치료의 급한 불은 껐고 며늘아기의 몸은 꽤 표시가 날 만큼 부른 상태다.
아빠의 발병 진단 이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은 우리 집으로 내려와저녁마다 한 시간 이상을 머물렀다.우리 가족호의 선장이 되어 아빠의 모든 치유 과정을 세심하게 계획하고 진행하며 매일매일의 컨디션과 증세를 체크하고 주의 사항들을 알려주며 필요한 조치들을 취했다.
누나인 두 딸들도 번갈아 드나들며 최선을 다했다.
치료에 필요한 과를 검색하여 병원 진료를 예약하고 영양제와 먹거리를 챙겨 오고 방에다 가습기, 공기청정기를 갖추고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전동 침대까지 주문했다. 그런 아들 앞에서 남편은 날마다 모든 느낌과 증상, 어려움들을 세세콜콜 이야기했다. 아들은 정성껏 귀 기울여 듣고 세심하게 대처 방안을 결정하여 실행했다.
퇴근 후 9시 반 경이면 어김없이 띠띠띠띠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성큼 들어서는 키 큰 아들의 부드러운 느낌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 아빠의코로나 전염을 염려하여 마스크를 쓴 채 물 한 잔도 입에 대지 않는다.
아들은 본인이 맡아서 관리해 주고 있는 우리의 자산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해 주며 돈 걱정 마시고 충분히 쓰시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권하고 싶은 영화도 넷플릭스에서 찾아 켜 놓고 가고 유튜브의 좋은 자료들도 많이 보내 준다. 분명히 잘 쓰실 거라며 나랑 남편의 핸드폰에 유튜브 프리미엄도 깔아 버렸다. 아빠가 좋아하는 역사나 본인이 권하고 싶은 경제 관련 책들도 틈틈이 택배 주문해 준다.딸들은 심리 관련 책들을 보낸다. 내면아이 돌보기, 암극복을 위한 환자의 긍정적 마음가짐 등이 주제다.
앞서가는 며늘아기의 차를 뒤따라 아들의 차를 타고 새로 이사하는 집으로 향했다. 이삿짐이 부려지고 가구들이 대강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보고 나는 귀갓길에 올랐다.
어머니를 집에까지 차로 모셔다 드리라는 사돈 내외의 강한 권유를 극구 사양했다. 아들은 전철역까지 배웅 나왔다. 10분 정도 함께 걸었다.
"엄마, 정말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옆에서 어른들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이사는 절대 못할 것 같아요."
"점점 관록이 쌓이면 너희들도 잘하게 된다."
역에 들어섰다. 개찰구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계단참에서 잠깐 뒤돌아보니 아들이 아직 개찰구 밖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의젓하고 따뜻한 분위기다. 그러나 내 마음은 짠하다. 나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고 나머지 계단을 올랐다. 그 이후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플랫폼에 이르러 빈 의자에 앉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혼자 덩그러니 개찰구 밖에 서 있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웃고 있었지만 괜스레 조금은 쓸쓸해 보였던 것이 나만의 착각이길 바랄 뿐이다.
도착한 이삿짐의 정리 정돈을 진두지휘하느라 바쁘신 바깥사돈과 한 손에 걸레를 들고 여기저기 보살피시는 젊은 안사돈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은 한결 가볍고 편안하다. 있어야 할 곳에 자리 잡은 아들네가 새삼 안심이 된다. 늦가을에 태어날 새 생명의 보금자리가 어르신들의 정성 어린 보살핌 속에 따뜻하게 자리 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