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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Aug 28. 2021

 중ㆍ고교 평준화 정책

  기성 세대가 우리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

 

ㅡ교육이야말로 정당하게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열쇠이다ㅡ


 이 정의는 전인류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세계적인 진리이다.

  그러기에 부모님들의 대다수는 자녀들의 상급 학교 진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그 관심의 과열로 치열한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진학 입시는 매년 홍역을 치르는 사회 문제 중 하나였다.

 중학 입시에 시달려 초등 아이들의 키가 안 큰다는 기사까지 신문에 실렸다고 한다. 그 폐해를 줄이고자 정부는 1969년에는 전국 중학교 무시험 진학 제도를 시행했고 1974년에 시작된 서울, 부산의 고교 평준화를 필두로 점차 전국적인 중ㆍ고교 평준화를 완결하였다.


 나는 부산에서 1967년~1969년 중학교, 1970년~1972년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지냈으니 입시 제도의 변화를 비켜났다. 전교생이 동질의 정체성을 지닌 집단 속에서 중ㆍ고교 생활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가 된 셈이다. 우리는 후배를 잃어버렸고 후배들에게는 선배가 없다. 수십 년 이어져 오던 전통이 끊어져 버린 이질적 동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중ㆍ고교 평준화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 논문들이 발표되며 찬성과 반대 이론들이 분분한 것 같다.

 소위 명문이라고 불리는 중ㆍ고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행운 탓인지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비평준화의 장점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 이유는 대강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학생은 아니더라도 전체의 30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학생들은 비교적 좋은 선생님들과 좋은 시설이 갖추어진 학교에서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거의 30년 후인 1990년대에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큰애가 추첨제로 사학 재단의 여자 중학교에 진학했다. 학부형의 입장으로 학교에 가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중ㆍ고를 같이 경영하고 있는 사립학교 재단 법인은 고등학교의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고등학교에만 신경을 쓸 뿐 중학교는 그냥 구색을 갖추기 위한 곁다리 정도로 운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학교 1학년이 되어 첫 배정을 받은 교실은 햇빛도 들지 않는 지하 교실이었다. 하루 종일 형광 불빛 아래 지내느라 우리 아이는 그때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다.

 도서관도 고등학교 건물에만 있었다. 그나마 고등학생들의 독서실 용도로 더 많이 쓰이니 중학교 1학년생 병아리들은 운동장 건너편에 있는 고등학교 도서관에는 쉽게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아니, 이럴 수가ᆢ. 지난 30년 동안 조국의 경제 발전은 엄청난 규모와 속도를 자랑하는데 교육 현장은 오히려 더 열악했다. 말로만 듣던 하향 평준화임이 확실했다.

 교육의 질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배우는 음악이나 체육 수업도 우리 때보다 빈약했다. 30년이나 먼저 교육을 받은 우리는 지금도 김대현, 브람스,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다 기억하고 있다. 1주일에 세 번 있었던 체육 시간 중 두 시간은 남자 체육 선생님께 운동장에서 각종 구기 종목과 줄넘기 등의 체력 증진 수업을 받았고 한 시간은 실내 마루 바닥 체육관에서 여자 체육 선생님으로부터 댄스와 스트레칭 등 유연성 함양 수업을 받았다.

 국영수를 비롯한 다른 학과 수업도 선생님들이 준비해 오시는 보충 교재 프린트물들이 두툼했다. 요즘처럼 컴퓨터 검색으로 필요한 자료들을 주욱 프린트해 내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께서 손수 밀랍지에 철필로 글을 쓰시는 필경이라는 과정을 거쳐 학교 프린트실에서 담당 사원이 종이를 한 장 한 장 등사기로 밀어서 찍어 내는 귀한 인쇄물들이었다.


 둘째, 부당한 체벌이 없이 학생들의 인격이 존중받는 분위기였다. 선생님들 중에는 모교 선배님들도 꽤 계셔서 우리들의 정서적인 면을 늘 많이 다독여 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자긍감을 높여 주셨다.

 가까운 친구가 최근에 들려준 일화가 있다. 집에 놀러 온 친구를 배웅해 주고 대로변 건널목에서 돌아서는데 봉고차에서 어떤 남자들이 내리더니 우리는 생활지도 단속 교사들인데 네가 지금 제과점에서 나오는 걸 봤다. 조사를 해야 하니 이 차를 타라고 강압적으로 나왔다. 그 당시 제과점은 학생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눈이 동그래진 친구가 또렷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제과점에 들어가지 않았고 방금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나는 ㅇㅇ여고 ㅇ학년 ㅇ반인데 선생님들은 어느 학교 교사들이시냐? 당황한 남자들이 차에 올라 부리나케 사라져 버리더라는 것이다.

 60이 넘은 우리는 그 시절 학교가 우리에게 심어 주었던 자존감을 기억하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학교와 교복이 우리들의 보호막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키워진 자존감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으로 이어졌다. 어느 공동체에 속해 있든 그곳에서 책임과 의무에 충실한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정신적 가치관 교육이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이었다.


 셋째, 학교 안에서는 왕따나 학교 폭력 같은 문제 행동이 없었다. 학급당 60명 정원 중에서 1등부터 60등까지 성적순이 매겨질 수밖에 없었지만 성적이 그리 크게 벌어지지는 않았다. 요즘 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풍경으로 선생님께 무례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나 공부를 포기하고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잔다는 것은 학생의 신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중간, 기말고사도 큰 부정행위 없이 무감독 시험이 계속 전통으로 이어졌다.

 60등이 1등을 부러워하긴 했지만 1등이 60등을 무시하거나 깔보는 일은 없었다. 모두 선별된 공동체의 동일한 구성원들이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 서로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넷째, 개인적인 사교육보다 학교가 전교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공교육 활동이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비평준화 교육은 과열 과외 학습의 폐단이 크다고 하지만 그것은 비교적 일부 학생들의 일부 교과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중ㆍ고등학교 입시를 거치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평가받을 수 있었던 비평준화 시대에 비해 모든 학생들이 초ㆍ중ㆍ고 학창 시절 내내 객관적인 잣대로 한 번도 걸러지지 않고 끝까지 대입을 향해 매진하는 현 교육 제도가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학부모의 사교육비 지출과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더 늘리고 있는 것 같다.

 중ㆍ고등학교 입시제도를 없애고 초등학교부터, 아니 유치원 시절부터 대학 진학까지 계속 입시 경쟁에 노출되어 있는 현재의 초ㆍ중ㆍ고 학생들의 학습 부담은 일부가 아닌 전체 학생들 모두의 몫이 되어 있다.

 30명 정도의 인원이 있는 각반에서 3등 안팎을 유지해야 겨우 인 서울 대학을 꿈꿀 수 있다는데 소중한 청소년기의 긴 시간을 이도 저도 아닌 내신 들러리라는 자조적 정체감까지 형성해 가며 같은 그릇에 담겨 있어야 한다.

 대학 진학밖에 다른 목표가 없이 모두가 같은 길을 달려왔으니 전국 지방마다 부실 대학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은 더 커지고 사회는 고학력 무직 대학 졸업자들로 넘쳐나고ᆢ . 경제 성장에 따라 사교육비 지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이유도 있겠지만 중ㆍ고교 평준화가 시행되고 있는 현재의 사교육비 부담은 그 이전에 비해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수능시험 점수에 따라 대입 진학이 결정될 때까지 학부모와 학생들의 혼신을 다한 경주는 초ㆍ중ㆍ고 학창 시절 12년 간 끝없이 지속된다. 가성비가 너무 낮은, 의미 없는 교육비 지출이 너무 많다.

 초등 저학년이 토플 교재를 들고 학원을 다니고 초등 고학년이 고등 과정 영수를 학습하는 학원을 찾는다. 학원은 그에 맞춰 공포 마케팅을 하고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많은 학부모와 아이들의 삶의 질은 떨어진다. 겉멋에 노출될 위험도 높다.


 동질성이 많이 떨어지고 개인 학습차가 큰 학교 교실 현장은 점점 더 그 권위를 잃어 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탓을 돌리며 학부모와 교사, 학생 간에 불신 풍조가 팽배해 있다.

 공교육이 죽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입에 오르내린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존중이나 배려보다는 네까짓 게 공부 좀 잘하면 다냐? 또는 공부도 못 하는 주제에ᆢ라는 시선으로 시기, 질투, 무시, 학대 같은 부정적 갈등 행동을 일삼기도 한다.

 학교 급식이나 냉난방 시설, 학급 당 학생 수 등 외적 환경은 6,70명 콩나물 교실이었던 우리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호화롭고 넉넉해진 데 반해 그 속에 담긴 내적 질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우리 세 아이들은 이미 학교를 다 끝내고 가정을 이루었으니 손주들 세대에서라도 좀 더 상향 조정된 고급 공교육을 통해 인격적인 대접을 받으며 의미 있는 학창 시절을 잘 누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50년 전 그 가난했던 시절에 우리가 누렸던 공교육의 풍요로움을 지금, 이 선진화된 조국에서 우리 후손들이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사립학교나 외국인 학교 진학을 위해 온갖 애를 쓰지만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하고 조기 유학까지 감행하는 교육받을 권리에 대한 욕망을 국가 차원에서 좀 더 효과적으로 만족시켜 줄 수는 없을까 싶다.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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