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다양한 얼굴들을 가지고 있다.
유년기, 험한 세상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는 부모, 형제들의 사랑. 청소년기, 알콩달콩 같이 시간을 엮어가는 동무들과의 사랑. 청년기, 설레는 마음으로 서로를 알아가고 나누는 이성과의 사랑. 중년기,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애지중지 보살피고 기르는 희생, 헌신의 사랑. 장년기, 오랜 기간 함께 가정을 꾸려오며 짐을 나누어 진 동지로서의 의리를 지키는 부부간의 사랑. 노년기, 나이 들수록 귀하게 다가오는 자식과 손주들, 후손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제는 얼굴 뵐 수 없는 부모님을 기억하며 어린 시절의 추억담들을 흉허물 없이 나눌 수 있는 형제간의 사랑 등이다.
오늘 특별히 나에게 '사랑'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것은 학창 시절이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던가? 나이 차이 많고 성향이 아주 이질적이었던 일곱 형제들. 각자의 강한 개성으로 시끄럽고 빈 구멍 많았던 우리 집. 나의 이상형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었던 우리 집.
고3 , 진학 희망 대학을 선택할 때였다. 집을 떠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나는 부산이 아닌 대구를 염두에 두고 경북대학을 써넣었다. S대를 나오시고 주요 과목인 영어를 가르치셨던 담임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나를 부르셨다.
"이놈아, 왠 경북이냐? 그러려면 차라리 동남아시아, 동아대학을 가지!"
결국 선생님의 의향대로 부산대학으로 결정되었다.
떠나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 그 공허를 메워 준 것이 내게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는 '학교'였다. 집 다음으로 시간을 많이 보낸 학교. 그곳에는 친구들과 선생님, 그리고 문화가 있었다. 높은 이상과 꿈이 있었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치르고 입학한 중학교. 모직 주름치마와 세일러복 상의의 교복을 갖춰 입고 이국적인 베레모를 살짝 옆으로 핀 꽂아 눌러쓰면 옆도 뒤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걷던 시절. 3,40분 정도 숨도 못 쉬게 꽉 찬 콩나물 버스에 실려 등하교 통학하던 중학교.
난생처음 보는 완전 개가식의 밝고 넓은 도서관. 비커, 알코올램프 등 신기한 과학 실험 도구가 가득 갖추어져 있던 컴컴한 지하 과학실.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프로판 가스레인지와 계량컵 등 다양한 사이즈의 각종 조리 기구들을 갖춘 신기한 싱크대가 주욱 줄지어 서 있던 가사 실습실. 까만 피아노가 놓여 있고 벤치식 의자와 책상이 있던 음악실. 잘 길든 목재 마루판이 저 끝까지 묵직하게 깔려 있던 대강당. 문을 열면 예쁜 꽃들과 함께 물씬 흙냄새 풍겨 오르던 따뜻한 온실.
국민소득 2000달러에 불과했던 1960년대 후반에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내게 학교는 안전하고 풍요로운 신천지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 까먹기가 바쁘게 1층 1학년 교실에서 4층 도서관까지 후다닥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집 오신 큰올케의 결혼 예물 손목시계가 중학생이 된 내 손목으로 옮겨와 있었다. 5분, 4분, 3분ᆢ. 아쉽지만 다음 수업 시간 2분 전에는 의자에서 일어나야 했다. 넓은 개가식 도서관 책꽂이 한 구석에 읽던 책을 몰래 꼬불쳐 두고 다시 교실로 뛰어가곤 했다. 방과 후를 기대하면서.
즐겨 읽었던 책들 중에서 아직 기억되는 것은 조흔파 선생의 얄개전 시리즈와 막 출간되기 시작한 과학 공상 동화들이다.
학교 정문 앞 책 대여점은 하교 시간, 특히 토요일 방과 후에는 학생들로 가득 찼다. 비좁은 구석에서 부대끼며 서가에 꽂힌 책들을 골라 빌려 읽었다. 을유 문화사에서 펴낸 초록색 표지의 두터운 세계 명작 소설 전집을 비롯하여 각종 무협 소설, 청춘 연애 소설, 여고시절 우리들의 막연한 우상이었던 전혜린의 수필집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우리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며 강추되었던 소설은 박계형 작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감미롭게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순정 연애 소설이었다. 하루 대여비가 2원이었던가? 등하교 마이크로버스 요금이 10원, 일반 입석 버스 요금이 8원이었다.
친구들의 책가방 속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 두터운 소설책 한 권 정도는 늘 들어 있었다.
그 밖에도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들과 각처에서 모여든 다양한 친구들과의 만남은 어린 나의 좁은 지평을 활짝 열어 주는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고 풍요로운 일상이었다.
매년 어버이날에는 연극반 아이들이 연극을 준비하여 강당에 부모님들을 모셔 놓고 공연을 해 드렸다. 그 전날에는 리허설 겸 우리 전교생들이 먼저 감상을 했다. 어느 핸가 막이 오르기 전 배경 음악이 너무나 경쾌하고 인상 깊었다. 그 곡이 '카르멘 서곡'임을 알고 한동안 그 곡을 듣고 또 들으며 그 찰랑거리는 음률에 폭 빠져 지내기도 했다. 그 곡을 들을 때면 아직도 강당을 향해 줄지어 가던 운동장이 떠오르고 무대를 가리고 있던 묵직한 커튼이 기억난다.
빨간색, 초록색 등 조잡한 플라스틱 레코드판 가격이 180원이었던 것 같다. 어렵게 모아진 용돈으로 소녀의 기도, 터어키 행진곡, 노예들의 합창 등이 실린 레코드 한 장을 사는 날은 뿌듯함, 그 자체였다.
중ㆍ고등학교 시절, 3년 동안 한 번씩 경험했던 생활관 실습도 뺄 수 없는 추억이다. 출석 번호대로 10명씩 한 조가 되어 학교 안의 생활관에서 상주하시는 담당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한 가족이 되어 일상을 배우는, 그야말로 생활 실습이다. 한복과 쌀을 준비해서 들어갔다.
10명이 정해진 날짜에 수업을 마치고 생활관에 입주하면 먼저 엄마, 아빠와 장남, 장녀 형제 순서를 정한다. 그리고 사복으로 갈아 입고 저녁 준비에 들어간다. 우리끼리 학교 밖으로 나가 장을 봐 와서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어먹고 설거지를 끝내었다.
첫날 저녁 식사 후 맨 처음 배우는 것은 손님께 차 대접하기였다. 전기 포트에 끓인 따뜻한 물에 홍차 티백을 곱게 우려내어 예쁜 찻잔에 담고 소반에 올려 다소곳이 손님 앞에 내놓는다. 약간의 다른 다과도 곁들였으리라. 그날의 손님으로는 그날 숙직 당번인 선생님을 모셔 왔다. 한복을 갖춰 입고 큰절을 올렸다.
그 당시로서는 최첨단 가전제품이었던 전기밥솥, 청소기 등의 작동 방법도 배우고 익혔다. 1960년대, 나는 티백 제품도 그때 처음 보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맡은 역할대로 아침을 지어먹고 각자 도시락까지 싸서 교실로 향했다. 생활 실습 선생님이 엄격하셔서 말끔히 정리 정돈이 끝나지 않으면 등교가 허락되지 않았다. 손에 익지 않은 집안일들을 허둥지둥 시간에 쫓기며 해치웠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검사가 끝난 후 미처 묶지도 못한 세일러복 리본은 한 손에 구겨 쥔 채 맨발 차림으로 교실을 향해 뛰기도 했다.
그렇게 2박 3일을 함께하며 손님 접대, 장보기, 청소, 취사, 요리, 예절 등을 배웠다. 마지막 날에는 학교 사진사 아저씨를 모셔다가 한껏 폼 잡고 이런저런 사진 기록을 남기는 시간도 예외 없이 주어졌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그 추억은 귀한 선물이다.
6년 내내 매년 연례행사로 치러졌던 학급 대항 합창대회와 체육대회, 미술대회는 물론 여름 방학 직전 사흘 동안 실시했던 해양훈련도 특별했다. 전교생이 모두 교복 차림으로 부산진역에 집합하여 완행열차 동해남부선을 타고 송정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준비해 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다 함께 두 팔 벌려 간격으로 해변에 늘어선다. 선생님의 호각 소리에 맞춰 국민체조를 끝낸 후엔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하루 종일 물놀이를 즐겼다. 비치 타월을 걸친 채 해변가 모래놀이도 하고 까만 타이어 튜브를 빌려 파도타기도 즐겼다. 저 한쪽 끝으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나머지 송정 바닷가 모래밭은 우리들 세상이었다. 사흘째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콧등에서부터 하얗게 한 꺼풀씩 벗겨져 나왔다.
내성적이고 소통에 서툰 내가 그래도 비교적 회복 탄력성이 높고 긍정적인 편에 속하는 것은 학창 시절의 그 풍요로운 자산들 덕택인 것 같다.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학창 시절.
그 밑바닥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결같았던 어머니의 헌신과 좌충우돌 각자의 인생 격랑에 흔들리던 여섯 형제들의 격려가 큰 바탕 그림이 되어 나를 품어주고 있었다.
2020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