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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Sep 04. 2021

 필리핀 나보따스

    어린 소녀

 

 일 년에 한 번씩 경비의 절반을 본당 후원으로 떠나는 구역장, 반장의 피정이나 성지순례 여행이 있다.

 반장을 맡고 있었던 2013년 3월, 3박 4일 일정으로 필리핀을 다녀왔다.

 

 우리 성당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필리핀의 나보따스 지역 방문이 여행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세계 3대 빈민 지역 중 하나라는 나보따스. 방배4동 본당에서 지원하여 세운 크고 밝고 아늑한 성당과 유치원 마당에서 많은 아이들이 밝게 웃으며 놀고 있었다. 부대시설인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들도 행복해 보였다. 어떤 아이들은 자기 몫으로 나오는 빵을 엄마에게 주고 싶다고 손도 대지 않고 집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상하수도 시설도 화장실도 없이 동네 옆을 흐르는 시커먼 강물을 생활용수로 이용하고 비닐봉지에 넣은 배설물들을 바로 그 강물에 떠내려 보낸다는 그곳.


 현지인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한국에서 파견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님들이 똑같이 준비해 놓으신 조그만 선물 자루들을 들고 짧은 영어를 할 수 있는 현지 통역 봉사자를 따라 세 명씩 짝을 지어 세 집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한결같이 시멘트 바닥 그대로인 한 칸짜리 방과 그 앞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부엌으로 이루어진 좁은 공간에서 대여섯 명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방은 잠 잘 때나 들어가는 곳이고 대부분의 낮시간은 좁은 골목에 놓여 있는 좁고 긴 나무 의자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지내고 있었다.

 아주머니나 좀 자란 소녀들의 품에는 예외 없이 젖먹이 어린 아기들이 안겨 있었다.


 현지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사이로 골목길을 지나 두 번째 들른 집에는 어린 소녀가 앓아누워 있었다. 그 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의 첫 외손녀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그 어머니는 마치 우리가 구세주라도 되는 양 병원 진료서로 보이는 종이를 꺼내 들고 낯선 언어로 간절하게 뭔가를 말했고 현지 봉사자와 우리는 짧은 영어로 간단하게 그 소녀가 힘든 병을 앓고 있다는 정도의 정보를 주고받았다.


 형식적인 현지 방문 일정을 끝내고 그다음 이틀 간은 자연 피정이라는 이름 하에 눈과 입이 호강하는 풍요로운 관광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계속 그 어린 소녀에게 뭔가 해 줘야 한다는 마음속의 속삭임이 떠나지 않았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 천 달러를 준비했다. 본당 신부님께 그 소녀의 신상을 아는 대로 말씀드리고 돈을 건네 드렸다. 


 며칠 후, 그곳에서 봉사하시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님께서 신부님에게 메일을 보내 주셨고 신부님은 그것을 출력하여 나에게 전해 주셨다.

 그다음 주일 미사에서는 신부님께서 이곳을 위한 2차 봉헌금을 제의하시어 그 자리에서 바로 천만 원이 모금되기도 했다. 우리가 우리 손에 있는 것을 정말 조금 내려놓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신 것이다.


 수녀님의 편지를 옮겨 본다.


 ㅇㅇㅇ 바오로 몬시뇰 님께

 몬시뇰 님 안녕하셨어요?

 저는 필리핀 나보따ㅇㅇㅇ 로사 수녀입니다. 어제 몬시뇰 님의 전화를 받고 저희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니 단지 기뻤다라고만 표현하기엔 너무나 큰 감동에 전율마저 느꼈습니다. 골육종을 앓고 있는 어린 소녀의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저희들 간절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 왔는데 이렇게 이루어지다니요.


 저희들이 무료 클리닉을 하는 날, 3월 첫째 주 화요일이었습니다. 한 엄마가 오른쪽 무릎에 부목을 댄 딸아이를 안고 저희들에게 영양제를 청해 왔습니다. 아이 엄마가 가져온 봉투 안에는 아이의 병명은 골육종과 영양실조이고 이미 절단 수술 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더 이상 입원비를 감당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집에 머물고 있는데 해 줄 수 있는 것이 좋은 영양제를 먹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희에게 도움을 청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디선가 추천받은 영양제 팸플릿을 저에게 전해 줘서 저희는 그렇게라도 꼭 도움을 주고자 직접 그 팸플릿의 연락처와 며칠에 걸쳐 수 차례 연락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아 이상하게 여겨 이곳 간호사와 전문 약국 약사에게 문의하니 그냥 일반 영양제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하며 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그 약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실도 알리고 집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처음으로 아이의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지저분한 방에 아이가 누워 있었습니다.

 육 남매 중 넷째, 이름은 ㅇㅇㅇ Ponce.  8살.

 엄마에게 팸플릿의 약에 대해 설명을 하고 당분간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으로 의사 처방에 따른 고통 완화제를 구입해 주고 어린이 비타민제를 공급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방구석에서 고통을 참으며 누워 있는 아이를 두고 나오면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닥다닥 붙어 사는 이웃들은 밤마다 아파서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 막상 아이가 처한 환경을 알게 되니 아이에 대한 마음을 돌릴 수가 없어 저희 수녀들 늘 기도 중에 주님의 도움을 청해 왔던 것입니다.


 그 후 몇 차례 과일과 영양제를 사 들고 이 집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어제도 방문하는 날이었습니다. 아이는 유난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구입해 준 고통 완화제도 아이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 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엄마는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것인지, 저 또한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젯밤에 몬시뇰 님으로부터 자매님의 후원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아이의 마지막 남은 날들을 보다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기쁨, 또 가족들이 지금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마음이 벅차올랐습니다.

 아이의 남은 날이 얼마 안 될지도 모르겠기에 제 마음은 바빠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당장 이곳 봉사자들과 과일을 사 들고 그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아이에게 지난번 이곳을 방문했던 한국 자매님과 몬시뇰 님이 아이를 도와주시겠다고 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엄마는 얼마나 큰 감사를 표현하던지요.


 이미 병원에서 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저는 오직 아이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고 마지막 가는 길에 좀 더 깨끗하고 제대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어린이 병원에 입원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원한다면 아이를 조금 덜 힘들게 할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엄마 자신은 원하지만 아이는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저 또한 지금 상황에서는 아이에게 가장 편하고 행복한 방법을 선택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병원에는 가기 싫다고 하면서 집에서 엄마와 가족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것입니다. 전 필리핀 사람들의 특별한 가족애와 함께 이미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을 알고 있을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아이를 존중해 주고 싶었습니다.


 함께 간 봉사자들과 간단히 의논하고 그렇다면 집에서 좀 더 편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여 먼저 비닐을 깐 딱딱한 낡은 요 대신 푹신한 매트를 구입해 주기로 했습니다. 당장 시장에 달려갔습니다. 폭신한 스펀지 매트와 알록달록 어린이가 좋아할 면 시트와 푹신한 쿠션, 또 아이가 갈아입을 면으로 된 옷가지들을 구입했습니다.

 다시 아이 집으로 가서 예쁜 시트로 싼 매트를 깔아 주고 푹신한 쿠션을 건네주었습니다. 아이는 활짝 웃음을 지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어서 은인분께 보내 드려도 되겠냐고 하니 기꺼이 포즈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예쁘게 나왔는지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이는 행복해졌습니다.


 오늘은 성 목요일입니다. 최후의 만찬과 함께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에 젖어옵니다. 끝까지 ㆍㆍㆍ.


 아이는 비록 자신의 머리보다 더 커진 다리의 암 덩어리의 고통과 함께 지저분하고 누추한 작은 방에 누워 있을지라도 이 지상에서 끝까지 자신을 사랑해 주고 계신 예수님을 몬시뇰 님과 자매님을 통해 느끼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의 고통 완화제가 필요할 것이고 아이가 매일 먹을 수 있는 과일과 야채들 (이곳에선 가난한 이들은 밥과 짠 생선 한 마리가 식사의 대부분이고 과일 야채는 비용 때문에 잘 먹지 못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영양을 흡수할 수 있도록 돕는 영양제를 공급할 계획입니다.

 그 외에 아이가 보다 나은 환경을 접해 볼 수 있는 소모품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 머지않아 아이가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시간이 오면 아이의 의지와 달리 부득이 응급으로 병원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후엔 모두가 나누어야 할 이별의 시간을 위한 비용들, 그리고 현재까지 병원비로 떠안은 가족의 부채들이 후원금으로 해결될 듯합니다.

 한꺼번에 돈을 모두 건네면 자칫 다른 유혹이 생길 수 있을 것이 염려되기도 해서 수시로 방문하면서 필요한 대로 지출해 주고 모든 일이 끝나면 잔액 전체를 부모에게 전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첨부 파일로 아이 사진을 보내드립니다. 누워 있는 것은 방문 전날 찍어서 저희 카페에 올린 사진이고 앉아 있는 사진은 오늘 찍은 사진입니다. 얼굴까지 많이 전이되어 왼쪽 뺨이 부풀어 올라 있습니다.


 몬시뇰 님,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자매님에게도 저희들 세 수녀의 감사를 꼭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사는 몬시뇰 님과 자매님, 그리고 방배 4동 신자들에게 성주간의 특별한 은총과 함께 기쁨 가득한 부활 되시길 저희들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2013년 3월 21일 목요일.

   나보따스에서 ㅇㅇㅇ 로사 수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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