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실존주의?
월요일에 4년 만에 본 고향 친구랑 술을 마시고 있던 중 누나에게서 충격적인 카톡이 왔다.
‘엄마가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있는데 쓰러지셨대. 다행히 옆에 있는 사람이 일으켜주셔서 다행이지. 큰일 날뻔했어‘
충격이었다. 요즘 아빠가 정년퇴직을 하며 집에 돈 문제로 시름하던 중, 작년에 누나가 건강 문제로 퇴사한 후 집안에 돈의 먹구름이 점점 드리워졌다.
그렇게 휴학을 하고 있던 나는 집의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힘이 되어주고 싶어 용돈을 받지 않고 8개월째 생활 중이다. 일주일 4번 하루에 8시간 정도로 편의점에 일하고 있고, 내가 먹을 식비와 생활비 정도는 내가 벌고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본가에서의 돈 문제였다. 억대 연봉을 받던 아버지의 수입이 갑자기 줄어드니, 평소 쓰던 생활비의 양을 갑자기 확 줄일 수가 없었고 그렇다 보니 돈 문제로 자주 싸우게 되었다. 추가로, 형이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서 돈이 말 그대로 항아리에 구멍 난 듯 나가게 되었다.
30년 동안 가족만을 위해 달려온 아버지를 뭐라 할 수는 없을 것 아닌가. 그래서 이미 편의점 일을 하고 계시는 어머니가 더 열심히 했다. 편의점 2개를 점주로 있으면서 일주일에 한 번 쉬고 매일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아침 6시, 어느 때는 아침 5시에 나가 저녁이 다 되어야 집에 돌아왔다. 알바가 갑자기 빠지는 날에는 저녁에 퇴근하고 나서도 또 밤에 출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 모두 돈의 압박에 시달리며, 엄마가 이른바 ‘가장’이 되며 힘겹게 1년간 끌어오고 있을 때 이런 비보가 날아온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 엄마의 체력이 영원하지 않은 한 예상가는 일이었다. 20대인 나도 주 4일 알바를 하고 힘들다고 찡찡대었지만 슬슬 60대를 바라보는 엄마가 주 6일에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으니, 이만하면 오래 버틴 것 같았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어 집에서 조금 쉬면 될 것 같다고 하지만, 이런 일이 두세 번 안 일어날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런 급한 일에 빨리 본가에 와서 엄마 돕기나 할 것이지 뭐 하고 있냐고 재촉했다.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심한 일은 아니라고 하니 정해진 대로 알바끝나고 설날 전날 내려가기로 했다.
인생 처음으로 부모님의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25살의 나이를 먹었지만, 일주일에 전화를 두세 번밖에 전화를 하지 않는 나지만, 마음이 심란해졌다. 부모님 눈에는 우리가 아무리 커도 아이 같아 보인다고 했던가. 우리 눈에는 부모님이 아무리 늙으셔도 단단한 산처럼 보일 것 같다. 몇십 년이 지나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변함없는 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산이 한순간에 없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내 마음속의 중요한 한 부분이 텅 빈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우리들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결국에 모든 인간은 죽음에 도달한다는 것을. 중국을 통일시킨 진시황조차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 불멸이라는, 그런 사실은 젖 먹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 부모님도 영원하지 않을 것도 예측 가능한데, 왜 나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살았던가. 왜 나는 그 사실을 애써 회피했냐 하며 자책했다.
오늘 알바를 하면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다. 제목에서 스포 했듯이 이반 일리치가 죽으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마치 진짜 겪은 것처럼 묘사한 장면이 인상적인 책이다.
그 책에선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는 키지베터23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논법, 즉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는 죽는다 “라는 예는 항상 카이사르와 관련해서만 생각했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인간들은 원래 이렇게 생각하는 종인가 보다. 누구나 아는 죽음이라는 결말이 있지만, 자신이나 그 가족은 그것에 해당되지 않을 것 같은 특수성이 있는 것 같은..
아아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가. 자신의 앞날을 알면서 모른 체하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문학을 읽고, 영화를 보고, 철학을 본다. 사실 이런 삶의 허무함을 어떻게 떨칠 수 있는지는 알고 있다. 바로 ‘실존주의’이다.
간단히 말하면, 실존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철학이다. 모든 물질에는 ‘본질’과 ‘실존’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본질은 그 물질이 쓰이는 이유, 실존은 그 물질 그 자체다. 예를 들어, 의자는 사람들이 앉기 위해 만들어진 목적(본질)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의자 그 자체(실존)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본질, 즉 용도에 따라 사물을 판단한다. 앉을 수 없는 나무판자를 의자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목적(본질)을 부여받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존재 이유를 만들어 간다. 인간은 단순히 쓰임새로 평가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 자체로 의미를 찾는 여정을 떠나야 한다. 이 철학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 요약된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 <진격의 거인>의 아르민이 이런 표현을 했다.
‘해 질 녘, 언덕에 있는 나무를 향해 셋이서… 달리기를 했어요…. 말을 꺼낸 엘런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하고… 미카사는 일부러 엘런의 뒤를 걸었죠. 역시 난 꼴찌였고... 하지만 그날은 바람이 미지근하고 그냥 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어요…. 낙엽이 많이 떨어졌죠. 그때… 저는 어째서인지 생각했어요. 나는 여기서 셋이서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닐까 하고….‘
즉,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추억이라도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나도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맛있는 것을 먹는 이런 일상의 추억 때문에 살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면 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죽음을 생각하면 막막해지는 것을 보니 아직 생각이 확실히 자리 잡지 않은 것이 어리다는 방증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어머니의 쓰러짐과 죽음이라는 현실을 통해, 실존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걸 배웠다. 어머니가 단단한 산처럼 나를 지켜주셨던 것처럼, 이제 내가 그 자리를 조금씩 채워가야 할 때라는 걸 깨닫는다.
아마 앞으로도 삶은 여전히 힘들고, 허무함과 두려움이 나를 흔들겠지만, 그럼에도 오늘 이렇게 글을 쓰는 순간처럼, 내가 스스로 의미를 찾아 나가는 한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다고 믿는다. 어머니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면, 바람이 미지근한 어느 날, 함께 산책을 하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