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팀장에게 배운 감사
나이가 들 수록 진해지는 감정중의 하나가 아무 대가 없이 상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맹자의 '측은지심'이라는 사자성어가 좀 비슷할까요? 측은지심의 뜻을 살펴보니 "남을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감정은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도 아니고 은혜를 베푸는 상위자로서의 측면이 아닌 동등한 인격체로서 그저 그 상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라... 달리, 적절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는군요. 그나마 비슷한 말이니 좀 차용하기로 합니다.
한창 중요한 프로젝트로 바쁜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 팀 하고는 크게 관련이 없는 팀이지만, A팀장은 저를 참 안타깝게 여기더군요. 저를 보면 '얼마나 바쁘실까', '얼마나 힘드세요', '참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는데 힘내세요. 나중에 제가 맛있는 저녁 대접할게요' 이러면서 간식거리를 건네기도 하고, 업무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A팀장은 저보다 상급자이기도 했지만, 향후에 업무적으로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낮고, 제가 어떤 도움을 주게 될 가능성도 매우 낮은데, 별 의도가 없이 안타까워하는 겁니다. 그런 의도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왔습니다. 나중에 느낀 것이지만, 그건 그분의 측은지심의 마음이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의 감정이 자신과 이입된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요? 저도 이런 기분을 비슷하게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젝트로 너무 바빠서 하루 2~3시간씩 자면서 격무에 시달릴 때였습니다. 밤에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집에 도착하여 잠깐 눈을 붙여도 새벽 3시쯤에 어김없이 눈이 떠집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아른아른 거려 그냥 서류가방을 챙기고 회사로 나가려던 순간입니다.
현관에서 거울을 보는데, 저의 모습은 잠을 제대로 못 자 눈은 퀭하고, 잘 다듬지 못한 옷매무새로 영락없는 폐인의 모습입니다. 한숨을 내쉬는데 그 순간 정돈되지 못한 신발들을 보았습니다. 별생각 없이 신발들을 정리하고 나니 문득 싱크대가 생각났습니다.
싱크대에는 큰 싱크볼 위에 어지럽게 쌓여있는 그릇이 정돈되지 못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오래전이라면 "남편은 중요한 회사일로 바빠 정신없는데, 집안꼴 하고는 정말 한심해서 못 봐줄 지경이네"라고 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회사일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일도 같이 못하고, 아이들도 혼자 챙겨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는 마음이 불현듯 생겼습니다.
그리고 집안을 간단히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싱크대까지 정리하고 나니 1시간이 더 지났습니다. 바쁜 회사일이 부담되긴 했지만, 그래도 깨끗해진 집안과 싱크대만큼 마음도 깨끗해진 기분이었습니다.
아내에게 칭찬받고자 한 일도 아니었고, 그냥 아내가 안타까워 설거지를 한 것이었는데, 그 이후 아내의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그 잠도 못 자는 바쁜 와중에 집안일을 해 놓고 간 것에 큰 감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우리는 맞벌이 부부고 소득마저도 비슷해서 집안일을 두고 신경전을 벌일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가벼운 잔소리야 서로 간에 있긴 했지만, 크게 싸우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덜 힘들게 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집안일을 하는 경우가 잦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잠을 못 잔 힘든 와중에 제가 어찌 그런 안타까움을 느꼈을까요? 어찌 보면 위에서 얘기한 A팀장의 영향을 받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A팀장을 볼 때마다 저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give and take에 익숙한 저는 아무 대가 없이 상대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형제나 부모자식 간에는 예외입니다. 피로 맺어진 관계에서는 어떤 희생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해당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나고 A팀장은 약속대로 저한테 거한 식사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이유는 '고생했다'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는데 너무 안타까웠다는 겁니다. 넓게 보면 회사를 위하는 것이니 본인한테도 고마운 거 아니냐면서 힘든 일을 성공적으로 마쳐주시니 감사하다는 겁니다.
이제 그 분하고는 물리적으로 한 참 떨어져서 왕래가 거의 없긴 하지만, 그때의 그 친절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저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편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함부로 하려는 심리는 의식적으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조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다 보면 그 관계도 개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몰래했던 그 설거지가 부부 관계를 개선시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만, 오히려 그것은 진심이 통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