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상보단 순댓국

by 술대신차

#1. 수라상보다 순댓국이 좋은 이유


오랜만에 친한 친구와 함께 순댓국집에 들렀습니다. 담소를 나누기 좋게 한정식을 갈까도 했지만, 차분한 이야기는 식후 커피숍에서 해도 될 테니 마음이 더 가는 음식을 선택했습니다. 순댓국을 먹을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옛 기억이 있습니다.


신입시절의 얘기입니다.

신입시절은 의례히 그렇듯 회사 선배나 중역들과의 오찬이 종종 있습니다.


한 번은 정말 비싸고 고급진 한정식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여러 코스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좋은 코스인 수라상을 먹게 되었습니다. 한우 소고기에 자연산 송이버섯을 비롯, 보리굴비, 간장게장에다 이름도 생소한 고급 산나물들이 차례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회사 중역들과의 오찬은 마음이 편할리 없었습니다. 언제 CEO의 질문이 내게로 향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중역들의 시선처리도 신경 써야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다 하나, 덥석덥석 먹기도 보기 좋지 않기 때문에 마치, 임금과 겸상을 한 것 마냥 온몸은 경직되어 있고 마음도 갑갑합니다. 당연히 그 본래의 맛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오찬이 무사히 끝나고 마치 볼일을 끝낸 고양이처럼 한결 마음 가볍게 다시 회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다음 날은, 전 일 오찬을 함께했던 동료들과 함께 순댓국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순댓국을 기다리다가 제가 물었습니다.

"중역들과 함께하는 한정식이 맛있나, 아님 이렇게 편하게 먹는 순댓국이 맛있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당연히 순댓국이지, 산해진미도 임금 앞이라면 풀죽보다도 못한 것이지"

"그렇지, 맘 편하게 먹는 음식은 약이고, 불편하게 먹는 음식은 독이지"


이윽고 순댓국이 나왔습니다.

새우젓 약간, 들깻가루 듬북, 청양고추를 좀 더 넣고 다진 양념까지 풀어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습니다. 그리고 맛있게 익은 깍두기와 막 담근 겉절이를 같이 먹으니 전 날의 그 풍성하고 진귀한 음식보다 몇 곱절 행복한 맛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2. 한정식이 더 맛있다는 동료


그때, 동료 중 한 명이 음식점 안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사이로 형성된 우리들의 공감대를 허무하게 깨 드리며 말했습니다.


"난, 지금 먹는 순댓국보다 어제 먹은 한정식이 훨씬 맛있는데, 왜 이따위 순댓국이 더 맛있다고들 하는 거지?"


다들 놀라는 시선으로 그 동료 A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순댓국이야 언제든 먹을 수 있잖아, 그런데 어제의 그 산해진미를 평소에 먹기가 쉽나? 다들 지갑이 두툼하신가? 어제 자리는 신입직원들을 격려하는 자리지 책망하거나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잖아. 평소에 못 먹는 음식들, 난 하나씩 맛보면서 너무 좋던데?"


그러자 다른 동료가 부러워하듯 말했습니다.

"오! A 씨 훌륭한데~ 나도 그렇게 음식을 즐기며 먹을 것을... 괜히 벌벌 떨며 먹은 것 같아"


#3. 그녀가 한정식이 좋았던 진짜 이유


위의 '수라상과 순댓국' 일화는 지금은 오래전 일 이긴 하지만, 어제의 일처럼 생생합니다. 그토록 잘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의례 나타나는 머릿속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A는 멘털이 강하거나 마음조절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부담스러운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음식 맛을 잘 느꼈을까요? 사실 그건 아니었습니다.


A는 얼마 후, 다른 동료들이 무난히 해냈던 '직무역량 향상을 위한 자기 다짐 발표회'에서 처참하리만큼 발표를 못했습니다. 준비를 잘 못한 탓도 있지만, 너무 긴장돼서 그랬다고 얘기했습니다.


사실, A가 한정식에서 중역들에 크게 상관하지 않고 맛을 제대로 느꼈던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녀의 취미가 바로 '맛집 탐방'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TV에 나온 맛집은 빠짐없이 가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먹기 힘든 매우 비싼 음식을 맛보고 인터넷 동호회에 그 맛을 자랑할 기회가 왔으니, 중역들에 대한 부담감보다 가지고 있는 핸드폰(피처폰)으로 어떻게 몰래 사진을 찍고 맛을 기억할 것인가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4. 그래도 나는 편한 순댓국이 더 좋다.


이젠 저도 그때보다 연륜이 있고 직위도 올라갔을뿐더러 관록이 쌓여 그런 부담감은 잘 느끼진 않지만, 그래도 어려운 식사 자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그런 다음날은 가장 편한 사람들과 함께 하곤 합니다. 특히 순댓국은 그 주요 메뉴 중의 하나입니다.


순댓국이 좋은 이유는 가격이 부담 없는 것도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데로 토핑을 하고 간을 맞출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찔끔찔끔 간질맛나게 나오는 한정식보다 푸짐하게 집중해서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그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물론 편안한 자리에서 편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수라상이 더 좋은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번 이야기에서는 '부담스러운 한정식'과 '편한 순댓국'의 대결을 의미하는지라, 이렇게만 본다면 저는 여전히 순댓국에 손을 들겠습니다.


무엇보다 순댓국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사이라면 정말 편한 사이라는 방증입니다. 뭔가 격식을 따지면서 먹는 자리에는 섣불리 선택하기 어려운 메뉴입니다.


순댓국과 함께 나오는 김치와 깍두기도 훌륭한 반찬이지만 어찌 보면 그 편안함은 임금의 수라상에서는 같이 나오기 힘든 매력적인 반찬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편한 순댓국을 친구와 제가, 별 말도 없이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싹 해치우고선,

"짜식, 잘 먹네~" 하면서 함께 껄껄 웃으며 음식점을 나와 커피숍으로 향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진한 들깨향의 그 순댓국이 그립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 가족과 한번 더 먹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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