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도한 스컹크 Mar 28. 2024

내가 생각하는 한국의 저출산

한국과 캐나다

한국은 인터넷 기사에 아이들이나 여성혐오에 대한 자극적인 글이 많다.

내가 캐나다에서 세명의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서였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누가 임신했다고 하면 싫어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막달까지 일해도

정기적인 첵업을 위해 병원을 다녀온다는 것은 

엄청난 눈치를 참아내며 다녀와야 한다.


야근과 회식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픽업해야 하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퇴근시간이 다가오면 복도에서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오늘 야근이야. 당신이 아이 좀 픽업해 줘."

"어제는 회식이었잖아. 당신만 사회생활해?"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어느 정도 크면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려야 하고

사교육비가 많이 들어 힘들어한다.

혹시라도 아이가 아프면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보다는

아파진 아이가 원망스러워진다.


인터넷으로 자주 보이는 기사 또한 자극적이다.

맘충이니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한다느니

다른 음식을 사 오거나 배달을 시켜서 먹는다는

아이를 키우는 가정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만드는 건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내가 캐나다에 온 이유 중 한 가지였다.


1. 캐나다에서는 다행히 여자와 아이들을 보호한다.

약자는 만만한 상대니 막대해도 된다는 시선이 아닌

보호해야 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아이들이 시끄러운 것은 당연한 것이고

유모차가 갈 수 있게 길을 비켜주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도와주는 사람들.


그렇다고 아이들의 부모가 아이들이니까 당연히 봐줘라 라는 식도 아니다.

부모도 최선을 다해서 훈육한다.

그렇게 훈육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은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설사 훈육을 하지 않더라도 그 부모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저런 부모 밑에 있으니 자식도 저렇구나라며 할 뿐.

그리고 지금 다 큰 어른들도 다 저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아기가 길을 가다가 넘어졌다.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옆에서 지켜주고 응원해 줄 뿐

아이를 직접 일으켜 세워주지 않는다.

그 아이가 길 한복판에서 넘어져도.

주위 사람들은 당연히 아이를 피해서 가고

아이에게 힘을 내라며 

부모에게 아이가 귀엽다는 인사만 하고 갈 뿐이다.

아이가 시간이 걸려 스스로 일어나면

부모는 아이를 마음껏 칭찬해 주고 응원해 준다.


이 모습을 보고 나는 충격에 빠졌다.

이렇게 바쁜 사회에서 아이를 기다려준다고?

아이가 길 한복판에서 넘어져서 다른 사람의 길을 방해하고 있는데

방해받은 사람들은 이걸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한국이었어도 그랬을까?


유모차를 가지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길을 터주고

앉으라며 자리를 양보해 준다.


2. 엄마의 사회생활이 한국보다 덜 힘들다.

임신을 해서 의사를 만나러 가는 것을 이해해 준다.

의사를 만나기 어려운 캐나다에서 의사를 만날 수 있게 회사에서도 최대한 배려해 준다.

내가 가지고 있는 휴가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는다.

아이가 아파서 며칠을 못 나가도

'아이가 아프니 어쩔 수 없지'라며 이해해 준다.


회식과 야근이 없으니 아이를 픽업하는 게 당연하다.

혹시라도 야근이 생기면 부모 중 한 명이 아이를 픽업한다.

사정이 생기면 본인 점심시간(30분 혹은 1시간)을 밥 안 먹고 일하고

일찍 퇴근한다.


나랑 같은 콘도에 사는 엄마는 도서관에서 일한다.

아이를 본인이 픽업해야 하면 본인의 점심시간을 아이 픽업하는 데 사용하고

(밥을 안 먹고 오후에 아이를 픽업해 온다.)

본인이 일하는 곳에 아이를 데려와서 책을 보게 한다.

그리고 퇴근시간에 아이랑 같이 퇴근한다.

집에 어른 없이 아이만 있으면 안 되는 캐나다의 법이 이럴 때는 좋아 보인다.


3. 정책이 다르다.

한국에서의 삶은 빡빡하다.

월급으로 방세를 내고 생활비를 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그러니 당연히 아이를 가질 생각을 못 하는 것 같다.


물론 캐나다도 삶은 빡빡하다.

이민자의 삶은 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많이 낳는 이유는 정책이 아닐까 한다.

아이가 18세까지 양육비가 나오고

이 양육비는 우리 집의 인컴(소득)에 비례해서

우리 집의 소득이 낮으면 양육비가 많이 나오고

소득이 높으면 양육비가 적게 나온다.

아이가 어릴수록 양육비가 많이 나오고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양육비가 줄긴 하지만

18세 생일달까지 양육비가 나온다.


의료가 공짜이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 가는 비용이 무료이다 보니 부담이 적다.

약값도 소득이 낮으면 정부가 지원해 주거나 

좋은 회사에 다니면 보험으로 약값을 커버할 수 있다.

치과는 예외이다.

치과는 정부에서 커버해주지 않지만

요즘은 보험이 없거나 소득이 낮은 가정에 

치과치료도 이용할 수 있는 정책을 많이 제공한다.

의료가 공짜라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의사를 만나기가 힘들다.

가정의(패밀리닥터)를 예약해도 기본이 일주일 이상 기다려야 하고

갑자기 아파서 워크인이나 응급실을 가면 하루종일 기다리는 일을 각오해야 한다.


첫째 딸의 눈에 다래끼가 났다.

약사에게 가보니 패밀리 닥터를 만나라고 한다.

패밀리 닥터를 예약하고 2주 후 드디어 만났다.

그냥 따뜻하게 찜질해 주라고 한다.

집에 오고 찜질을 열심히 해줘도 계속 커진다.

아이는 아프다고 한다.

다시 패밀리 닥터를 예약하고 2주 후에 만난 의사는 안과의사에게 리퍼해주겠다고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과의사의 리퍼전화는 오지 않는다.

아이는 아프다고 힘들어한다.

다시 1주 후 패밀리 닥터를 찾아갔고

의사는 아직도 안과의사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냐며

너무 아프면 응급실로 가라고 한다.

딸은 무섭다고 싫다고 안과의사 리퍼를 기다리 자고 한다.

몇 주 후 드디어 안과의사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2달 뒤에 오란다.

안과의사는 워낙 없고 더욱이 아이를 봐주는 안과의사는 더 없어서 

2달이나 걸린다고 한다. 

병원 가기 정말 힘들다.

2023년 12월 초부터 시작된 다래끼는 2024년 3월 28일 드디어 안과의사를 만나러 간다.


4. 교육이 좋다.

사교육을 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모든 공교육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캐나다 교육이 좋다고 하는 것은 개인을 인정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서로 비교하지 않는 점이 좋은 것 같다.


소득이 적은 사람도 배움의 기회는 평등해야 한다고 해서

한국으로 생각하면 문화센터인 토론토펀 프로그램을 이용해 다양한 수업을 접해볼 수 있다.

사설학원보다는 저렴하고 가족인원수와 소득에 따라 정부에서 

보조금을 지원해 주기도 한다.

이때 아이들만 보조금을 지급해 주는 것이 아니고

어른도 보조금을 지원해 준다.

그래서 어른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만약 아이가 악기나 발레 등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자 한다면

이때부터는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배우기 전 까지는 비교적 저렴하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게 있다.

대신 그만큼 퀄리티도 좋지는 않다.


어디에서나 사람이 사는 곳은 다 힘들다.

특히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가 되면 삶의 무게는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

주위에서 보면 아이들 영어공부를 위해 방학 때 캐나다에 오고 다시 한국으로 가고

기러기 부모가 되거나 혹은

자녀를 위해 영주권을 목표로 캐나다에서 힘든 삶을 살다가

아이들이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하면

"너네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 불화가 일어나는 가정이 생각보다 많다.


한 레스토랑 사장 한인부부는 레스토랑을 자리 잡게 하느라

두 부부가 일만 했다.

돈도 많이 벌고 집도 좋은 하우스에서 산다.

어느덧 10대가 된 외동아들은 한국말을 못 한다.

부모가 일을 하느라 베이비시터를 고용하고 

어느 정도 커서는 비포스쿨 애프터스쿨을 보내느라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부모는 영어를 못하고 아들은 한국말을 못 했다.

부모는 아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어느새 10대가 돼서 친구가 좋아져 버린 아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함께 보낸 추억이 없기에 

부모와 거리가 너무 멀어져 버렸다.


돈이 필요한 아들은 레스토랑에 돈을 받으러 가고

부모는 아들을 안아주고 싶고

얼굴 한번 만져주고 싶지만

훌쩍 커버린 아들은 이런 상황이 어색하기만 하다.


그게 정말 아이들을 위한 것일까?

아이들이 정말 한 부모와 캐나다에 있는 게 행복할까?

부모가 영어도 힘들고 자리 잡느라 힘들어 아이를 잘 케어하지 못하는 상황을

아이들이 행복해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 커서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게 아이를 위한 것일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이도 행복하고 부모도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희생이라는 이름이 아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아이를 키우기 편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많이 들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품고 있는 날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