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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31. 2022

기술 축적과 전파---해외 기술연수와 출장

기술 축적과 전파---해외 기술연수와 출장

2018


한전에서 해외기술연수는 선진국에 가서 기술을 습득하여 국내에 전파하는 역할은 물론, 선진 회사와 선진 사회의 모습을 보고-듣고-배우고-느껴서, 개인생활은 물론 조직사회에도 은근히 그 앞선 문물을 전달하게 되는 일이었다. 해외연수는 외국어를 좀 더 잘하게 만드는 기회도 되었고, 그것은 개인의 소중한 자산이 되어, 외국뉴스와 발전소 관련 기술정보를 남보다 훨씬 빨리 알게 됨으로써, 이를 알게 모르게 많이 전파시켰다.


선진기술 습득의 첨병

나는 한전 근무 중에 연수교육을 네 번 다녀왔다. 세 번은 기술연수, 네번째는 한전과 구주전력 간의 교환형 정기 연수였다.

한전 직원들은 구미와 일본에 연수교육을 다녀와서 연수보고서를 쓰고, 신기술을 전달교육으로 전파했다. 나도 일본연수로 많은 기술을 얻어왔다. 내게 기회가 몰린 것 같아 송구하지만, 그와 달리, 오히려 일본에 익숙한 사람이니 더 많은 것(기술과 문화)을 배워왔을 수도 있었다고, 나름 합리화해 본다.

내가 얻은 기술 중에는, 나로서는 정말 새로운 것들이 많았고, 그것은 전달교육으로 많은 사람에게 전파했다. 


제1차 연수

1978년 1월 첫 방문. 영동화력 2호기 시운전요원으로 나갔다. 

한국사람 해외나들이는 극히 드물던 시절. 일본의 도시가 매우 정갈하고, 사회 질서가 정연하며, 인간 예절이 매우 바르고, 기술수준이 굉장히 높은 사회를 대하고 무척 많이-굉장히-뼈저리게 놀랬다. 그래서 이 사람들 잘하는 건 무조건 배우고 볼 일이라 생각했다. 물론 마음 속에는 언제든지 ‘능가일본’을 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게 하면서.

 오사카 연수센터에 짐을 풀고 2주 간의 일본어 교육에 들어갔다. 도착 다음날 아침에 산책을 나갔다가 길 가에 여러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검은 비닐봉투들을 요상하다 생각하며 살짝 열어보니, 그 때까지 한국사회에는 없던 쓰레기 분리 배출 봉투임을 알고서는 우리 연수생들이 많이 놀랬고,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던 컬러TV에서 복싱시합 도중에 새빨간 코피가 터지는 총천연색 화면을 볼 수 있어 실감이 나서 좋았고, 잘사는 재일교포는 벤츠를 두 대나 가지고 있어 부러웠다.

일본어 교육기관의 남자 선생님이 직접 커피를 타서 고객을 응대하는 모습에 무척 많이 놀랬다. 

당시 우리 회사에서는 차 시중은 상용원이라 불리는 여직원이 하는 일이었는데.

 어학교육 후 이바라키현 히타치시(日立市)로 옮겨, 터빈을 배웠다. 히타치 공장이 있다고 해서 도시 이름을 히타치 City로 만든 것도 특이했다.

지금은 철거한 구 삼척화력발전소 근무 시절에, 기술지도를 하러 삼척에 왔던 스즈키씨를, 이 때 다시 만났다. 그는 나와 내 동료를 집으로 초대하려고, 퇴근 후 시내 어느 음식점에서 만났는데, 자가용으로 우리를 픽업하려고 미리 나와 기다리시던 부인께서 우리에게 납작 엎드려 절을 하셔서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놀랍다. 일상생활에서의 일본 부인의 예의를 본 것이다. 우리가 무슨 상전이라도 되는 것 같은 그 장면은 두고두고 못 잊는다. 

당시 일본 여성의 약 30%는 운전을 한다고 들었다. 우리야 아직 자가용 시대를 꿈꾸지도 못 하던 시점이니, 대단히 놀랬고. 부인의 운전으로 대궐같이 큰 집에 가서 - 일본 사람들 집이 작다는 것은 도시인 얘기였다 - 2박하면서, 옛날 일본식 원형 목간통에 들어가 목욕도 하고, 생전 처음 ‘누드 박물관’에도 가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무덤이 있는 닛꼬(日光) 관광도 하며,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터빈 발전기 교육 중에 한 젊은 강사가 하던 말은 평생 잊지 않는다.


“우리는 해외 어디이건 우리 제품에 이상이 있다는 연락을 받으면 곧바로 비행기를 탑니다” 


 그들은 자사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담당 엔지니어가 군말없이-지체없이-시원하게 문제를 처리해주는 선진화된 회사 시스템으로 AS를 했고, 문제점은 모두 제품생산에 Feedback하는 그야말로 ‘꿈의 업무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우리가 무척 부족한 부분이 바로 이 분야인데, 그들은 오래 전부터 고객만족과 고객가치를 최우선으로 실행하고 있었다.

 이윽고 구레시(吳市)에 가서 보일러 교육을 받고 총 3개월 후에 귀국, 영동 2호기 시운전을 잘 마치고 거기서 근무하다가, 보령1,2호기 시운전요원으로 두 번째 연수교육을 나간다.


 제2차 연수

 1982년. 이번에는 간부 승진을 한 후였고, 보령1,2호기 석탄취급설비 시운전요원으로 나갔다. 

두 번째는 일본 남서부 야마구치현에 주로 머물면서, 규슈에서도 한 달을 보냈다. 규슈에서는 왜정 때 충북 충주에서 오래 사셨다는 할머니 집에서 한 달 간 하숙을 했다. 한국사람들이 원수로 여기는 일본 순사 나으리의 딸로 태어나, 18년 간 산 이 할머니는 일본보다는 한국의 모든 것이 더 좋다고 하시며, 나를 시장에도 데리고 가 일부러 미역을 사서 미역국도 끓여주셨다. 

연수 중에 견학한 ‘송도화력’의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500MW 2대인데, 삼척과 영동에서 그야말로 무연탄 탄가루와 씨름하던 나로서는 꿈의 발전소를 본 것이었다. 탄가루가 많이 날리는 우리나라 저열량 무연탄 발전소가 아니고, 먼지도 적고 열량도 높은 역청탄 화력발전소라는 ‘가슴뛰는 신세계’를 배워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파했다.


 “나도 저런 발전소 하나 가져봤으면….”


일본 최초로 ‘Silo식 저탄장’을 건설하는 시코쿠 전력의 ‘사이조’ 화력 견학도 했다. 보령과 같이 넓은 땅에 야적식 저탄장을 건설하는 게 아니라, 좁은 땅에 높이 올린 Silo. 우리는 언제쯤 저런 설비를 갖출까 하는 생각을 헀다.

딱 혼자서 6개월 동안 다녀왔는데, 연수보고서는 성의를 다해서 정리하고 제출하였다. 1차 연수 때 제대로 쓰지 못해 질책을 받았던 터라, 휴일에 정말 어디 구경도 못 다니고 방에 틀어박혀 보고서를 쓴 것은 한편으로 아쉽기도 하다.

귀국 후 전달교육도 성공적이었다. 보령화력 석탄설비에 들어온 하역설비와 운탄장비는 한국에는 삼천포화력 다음으로 설치되는 것이므로 사람들에게 생소한 판에, 일본인 기술자의 일본어 강의를 동시통역한다고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내 일본어가 쬐끔 늘었던 모양이다.

내가 일본에서 배워온 석탄설비의 시운전을 맡아서, 수백 건의 문제점을 발굴하고 처리하여, 나를 가르쳐준 일본인들로부터 “가르쳐준 회사에 너무 엄격하게 일을 한다”는 원망도 좀 들었다. 

나는 매사가 그 모양이었다. 눈치도 코치도 없고, 있는 그대로, 무조건 문제가 되면 그냥 못 넘겼다. 에이구 요 맹추야! 그래 가지고 어떻게 남한테 인심을 얻냐?


6개월 연수기간 내내 혼자 있다 보니, 너무 사람이 그리워서 연말연시의 긴 연휴를 이용해 신칸센 열차를 타고 아주 먼 길 스즈키씨 댁을 다시 방문했다. 참으로 상냥한 부인은 이미 3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던 터인데, 하필 부인의 웃는 모습 사진을 걸어 놓은 방에 내 이부자리를 펴주어서, 뭔가 좀 겁이 나던 기억도 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두산중공업 근무 때 스즈키씨의 연락을 받았다. 딸 내외와 서울을 방문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반가이 만났고, 딸 노리코는 배우 ‘원빈’을 좋아하는 ‘한류 팬’이 되어, 이미 한국에 10여 차례 방문하였다는데, 한국말도 아주-정말-안 틀리게 잘하고, 후에 주고받은 메일을 보니 철자도 안 틀리고, 띄어쓰기까지 완벽했다.

 1970년대 후반. 삼척화력발전소 터빈 보수공사가 끝나고 돌아가기 전에 스즈키씨는 자기가 가져온 제작도면을 한 장 한 장 쪽쪽 찢어서 휴지통에 넣던 모습이 생각난다. 우린 그럴 줄 알고 미리 살짝 XX해두었지만. 그게 벌써 40년을 훌쩍 넘긴 얘기이고….

세상은 많이 바뀌어 그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그의 딸은 한류 아줌마가 되고….

일본은 미워도 일본인 친구는 밉지 않다.


*2022년 현재

우리나라에도 ‘Silo식 저탄장’이 몇 군데 들어섰고, 전국의 노천 야적식 저탄장은 모두 옥내형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제3차 연수

1988년. ‘화력발전소 운전 및 성능개선’이라는 주제로 발전분야 4명, 송변전 등 타 분야 여러 명과 함께 떠났다. 이 번에는 내가 연수단장 자격이었다. 71일 간의 기간 동안 자세한 연수 내용은 연수보고서에 적었지만, 이 때의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아마도 연수기간 중에 ‘우리를 초청한 기관인 ‘해외전력조사회’의 좀 높은 간부와 한 30분 전화로 다툰 일인 것 같다. 

가르쳐주는 내용이 너무 초급수준이라고, 한 단계 더 높은 내용이 이미 일본전기신문에도 소개되었는데, 왜 그런 것조차 안 가르쳐주느냐고 강력하게 항의했던 일이 있다. 물론 그는 “Know How라서 안 된다”라 말했는데, 이런 것이 바로 기술 없는 나라의 설움이다.    


1988년 7월 10일 우리는 동경에서 비교적 가까운 ‘고마진자(高麗神社)를 방문하여, 고구려 왕족 약광(若光)을 모신 신전에 미리 한국에서 준비해 간 고려인삼주를 올리고 절을 하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 그 때는 조총련에 대해 겁을 좀 먹던 시절인데, 마침 그곳을 방문한,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조총련 여학생들 모습이 떠오른다.

 동경에 있는 동안, 연수생의 친척이 우에노(上野)에 사셔서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재일교포 할머니는 위풍당당한 풍채처럼 통도 크고 시원시원하셨다. 일본에서 풍파를 헤치며 살아나온 신기한 얘기들을 많이 들려주셨다. 그 중에서도 “오래 전에 일본에 있는 거북선을 봤다”는 말씀과, “자기부상열차는 소르본느 대학을 나온 내 아들이 일본에 특허출원을 했는데, 돈이 많이 든다고 받아주지 않았다”는 말씀이었다. 


 *2022년 현재

  자기부상열차는 미국, 일본, 독일, 중국 등이 맹렬하게 기술을 개발 중이다. 10월 뉴스에, 중국이 1톤 중량을 1,030km로 달리는데 세계최초로 성공했다. 5월에 이미 시속 600km-길이 53m의 시제품을 선보였다.


제4차 연수

1996년 11월. 이번에는 부장으로 진급한 상태에서, 규슈전력과의 정기연수였다. 이상영 발전사업단장님을 연수단장으로 모시고 여러 사람이 다녀왔다. 회사 경영측면에서 양사의 정보를 교류하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일본의 선진 제도

네 번의 일본연수에서 나는 상당히 많은 신기술을 배웠다. 한일 간 국력은 25년 이상의 격차가 있다고 말했는데,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1945년 2차대전 패망 때 이미 전투기-항공모함-잠수함을 자체생산한 나라이고, 패전으로 인해 그 기술자들이 죽은 것도 아니므로, 그들과 우리의 노벨상 수상자 숫자 차이만큼 기술격차는 물론, 사회 질서, 국민윤리마저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각 전력회사는 지금도 발전소에 어떤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공식자료를 Press Release로 발표하므로, 우리는 한국의 책상에 앉아 인터넷으로 일본 어느 발전소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어느 지역에 정전이 일어나도 어디서 몇 분 간 정전되었다고 다 발표한다. 

 대범한(?) 우리는 “뭐 시시콜콜 그런 것까지 발표하냐?”고 생각할 정도다. 그들은 투명하게 일한다. 첫 번째 연수 때부터 시골의 작은 구멍가게에서도 모든 물건에 정가를 붙이고 정가대로 판매하는 것이 이채로웠다. 바가지도 없지만 에누리도 없다.


중국 추현 발전소 출장

2002년 한국서부발전 본사 운영팀장 때 김윤태 전무님을 단장으로, 몇 사람이 추현(쯔우시엔) 발전소를 방문했다. 발전소를 보고 나는 정말 깜짝 놀랬다. 놀래서 펄쩍 뛸 정도였다. 

내가 35년이나 발전소에서 일해왔고, 주로 신설발전소에 근무하면서, 늘 세상에 내놓아 손색없는 발전소를 운영하려고 청결과 정돈에 신경을 써 왔는데, 이 사람들 해 놓고 사는 걸 보니 이게 어디 사람이 해놓은 건가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도무지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중국이라면 인구가 많아서 쓸 데 없는 종업원이 바글거리고, 한 수 아래일 것으로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우리가 세 수쯤 아래라는 걸 직감하고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무척 젊은 소장을 만났을 땐 “’문화혁명’ 때문에 어른들 다 숙청됐나 보지?”하는 생각을 했는데, 소장이 하는 말은 기가 찼다.


“나는 소장으로서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인원을 줄여서 효과적으로 운영할까를 생각합니다”. 


 발전소에 사람이 바글거릴 거라는 생각은 빗나갔고, 자본주의 사회의 민간기업에서도 저런 말을 함부로 못 하는데, 중국에서 자본주의보다 더 심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역시 인권을 무시하는 공산당 사회니까 저러는 건가?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중앙제어실에서는 Operator에게 물었다. 

“석탄 탄종이 바뀌면 당신은 무슨 조작을 하나?”라고.

“미국에서 도입한 연소 Software를 쓰는데, 내가 별로 하는 게 없다. 상태 변화 감시만 한다”라 대답했다. 그들은 무리하지 않게 정상적인 운전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발전원가 좀 줄이려고, 보일러 설계규격에 맞지 않는 저열량 연료를 너무 지나치게 많이 혼용하여 좋지 못한 변칙운전을 하므로, 석탄 종류가 바뀔 때마다 Operator가 해야 하는 조작이 많은데, 그들은 보일러 설계규격에 맞는 석탄만 사용하니, 별로 조작할 것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중국조차 보일러 설계기준을 준수하여 연료를 쓰는데…. 저들이 바보인지, 우리가 창의성이 우수한 건지, 느낀 바가 컸다.

  탄 가루가 조금은 날리는 게 정상인 것으로 알고 있던 미분기(微粉機) 실에도 석탄가루 한 톨 흘린 것이 없고, 머리 위 높은 곳을 지나가는 배관에는 먼지가 어느 정도 뽀얗게 앉아있는 것은 용인해야 정상인 걸로 알았는데, 내 눈으로는 먼지 한 알 찾을 수 없었다. 사실이다.

급수펌프 콘크리트 기초는 아예 목욕탕처럼 하얀 타일로 붙여 놓아, “뭐 이런 데가 다 있나?” 싶었다. 우리는 보통 터빈 건물 바닥에다 녹색 에폭시 페인트를 칠하여 마감하는데, 여긴 모두 큼직큼직한 타일을 붙여 놓았다. 녹색 바닥은 표면이 번들거려서 때로는 햇빛 반사도 심하고, 조명을 많이 잡아먹어 어둡지만, 여기는 바닥 모두 흰색 계열이라 분위기가 밝고, 흰색이니 무슨 부스러기 하나 떨어져 있어도 다 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어디 기름 한 방울 떨어진 곳 없고, 물 한 방을 새는 곳이 없다. 아마도 수리하는 사람은 한 번 수리하면 다시는 안 새게 수리하고, 닦는 사람은 티끌 하나 없도록 깨끗이 닦나 보다.

 빈 틈이 안보이는데,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철칙 하에서 일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도 궁금해서 물어보니, 이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 종업원을 평가한단다. 수 십 가지 평가항목이 있어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데, 그 결과가 분명하게 인사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즉, 평가에서 일정점수 미만이면 무보직시키고, 무보직상태에서 6개월이 지나도록 어느 부서에서건 데려가 쓰겠다는 사람이 안 나타나면, 발전소 아닌 다른 곳으로 좌천시킨단다. 발전소가 제일 대우가 좋기 때문에 쫓겨나면 그건 상당한 좌천이 된다. 

섬찟한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그들은 이런 정신속에서 살고 있었다.

아.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네. 한국에서는 발전소 사원 이동은 여러 발전소 중 다른 발전소로 전근을 가는 제도이고, 중국은 발전소라는 공장 구내에 은행도 있고-호텔도 있고-우체국도 있고-유치원도 있고, 다른 많은 시설이 같이 있어서 큰 단지를 이룬다 했다. 발전소에서 좌천되면 그 구내 다른 곳으로 간다 하니, 역시 급여나 처우가 달라지는 건데, 발전소 근무가 가장 대우가 좋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 제도는 무섭지만, 그러나 항상 그런 제도와 분위기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힘든 것도 아닐 것 같다. 일정 수준에 올려 놓기가 어려운 것이지, 일단 올려놓기만 하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고 그저 일상사에 그칠 뿐이다. 

수년 전에는 냄새가 나고 무척 지저분하던 우리나라 화장실이 요즘은 깨끗한데, 수 년이 지나도 변치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힘든 일일까? 바로 그런 변화가 우리 발전소에도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의 노예’라면서 공산당식 노동착취라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은 직업의식이 희박하여 프로도 아니고, 자유인도 아닌, 방종에 가까운 사람의 생각이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하는 인사고과는 반대하지마는 일을 철저히 하는 것은 적극 찬성한다. 평소에 내가 추구하고 요구하던 발전소 수준을 뛰어넘는 더 훌륭한 발전소가 거기 있는 것을 내가 직접 가서 보고 배웠다. 회사일에 성심껏 일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노예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힘든 일도 아니지만, 힘이 많이 들더라도 해야 하는 직장인의 본분이다. 이것을 ‘사회주의의 속박’이라 부를 텐가? 

이것은 노예가 아닌, 진정한 주인이 하는 일이다. 우리 민주주의의 자유가 ‘방종’에 가까이 가는 것과 심하게 대비되는 것을 느꼈다.  



터키 Tufanbeyli 발전소 출장

터키 투판베일리 (Tufanbeyli) 발전소는 150MW 3기의 규모로, 갈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유동층 보일러를 가지고 있다. 전세계에서 아마도 최저 수준의 발열량(1,250kcal/kg)에다가, 전세계에서도 최고 수준의 수분(약 50%)을 가진 터키 갈탄을 사용하므로, “저게 정말 불이 붙기는 붙는 거냐?”라는 의심에 찬 한국인들을 놀라게 하려는 듯, 150MW 정격출력을 초과하여 157 MW나 발전이 가능하고, 주증기, 재열증기 온도와 압력도 문제없이 정격운전을 달성하는 발전소다. 

이 발전소 시운전 중에 몇 가지 기술적 지원이 필요하여, 국내 전문가들과 열흘씩 두 차례 출장을 다녀왔다.

 나는 현지에서 ‘규나이든’과 ‘메라바’라는 딱 두 마디를 외워서, 우리 숙소에서 일하는 터키인들의 마음을 샀다. 두 번째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던 날, 숙소의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터키 아주머니들에게 인사하러 잠시 들렀더니, 아주머니들이 갑자기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오빠 사랑해요!”, “구레 구레(빠이 빠이)!”


그 터키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중에는 지난번 두 번째 출장 때, 무거운 여행 가방을 밀고 숙소에 도착한 내게 쏜살같이 달려와, 뺏다시피 덜렁 들어 방 앞에 옮겨주던 나이 많은 아주머니도 있었다. 순간 나는 깊은 정(情)을 느꼈다.

 내가 아는 터키 말은 Good Morning의 ‘규나이든’과 안녕하십니까의 ‘메라바’ 딱 두 마디. 그것으로 이런 정을 느낄 수 있다니, 사람은 다 똑 같은 게 맞앗다. 

터키출장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새벽 여섯 시쯤 밥 먹으러 가서나, 밥 먹고 나설 때나, 나는 손을 들어 “규나이든!”이라 말했고,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심코 지나던 이들에게도 “메라바!”라고 인사를 건넸다. 딴청 부리며 먼 산을 바라보던 숙소의 수위나 발전소 정문의 경비원들에게 인사를 걸면, 그들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손을 들어 화답했다. 

그들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취직한 노동자이지만, ‘칸 카르데시’의 피를 나눈 형제국가 사람으로,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를 주시하는 형제다. 사실 말이지, 돈이라면 오히려 우리가 그 나라에서 큰 돈을 벌려고 간 것 아니던가?

SK건설에서 이곳 투판베일리(지명)에 파견된 직원들은 참으로 다른 데 마음을 나눌 형편이 아닌, 피곤과 긴장의 연속이라는 것은 잘 안다. 이러는 내 말이 참으로 한가한 소리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마음의 여유가 없더라도, 그들과는 남다르게 잘 지내야 한다. 그들의 친절한 본성을 살려내야 한다. 그들에게 우리는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해야 한다. 그것은 비단 차기에 국제입찰에 나올지 모르는 ‘A Project’를 위한 작전상의 미소도 아니고, 그들에게서 자발적으로 우리의 부지런함을 배우게 함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터키 출장 직전에  심금을 찌르는 터키 관련 칼럼 하나를 읽었다. 조선일보 양상훈 논설주간이 쓴 것으로, 이제는 우리 대통령이 칸카르데시(피를 나눈 형제)라는 말을 할 차례라는 것이었다.


 터키는 공기가 무척 맑아서 약 25km나 떨어진 직원숙소에서도 빤히 보이는 보름달과 발전소. 

1,400m 고원지대인 이 지방 한 귀퉁이에 3단 높이로 터를 닦아 만든 발전소는 매우 큰 규모다. 

밤에 그 반짝거리는 두 불빛은 정말이지 ‘두 달’처럼, 보석처럼 맑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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