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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19. 2022

아버지의 트립(Trip)

아버지의 트립(Trip)

2012


트립(Trip)은 영어로, ‘여행’을 뜻하면서도 “무엇에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도 있어, 발전소에서는 고장이 나서 전기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 사용하는 단어다. 결국 트립이란 발전소가 제 기능을 다 하지 않고 어디 여행이나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일까?

여기 ‘아버지의 트립’이라는 제목은, 아버지가 저녁 5시에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가 이튿날 오전 10시까지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가 되어, 아버지의 기능이 트립됨으로써, 어머니가 밤새 한 숨도 못 자며 울기 직전까지 가고, 자식들이 아빠 찾아 무작정 거리를 헤맨, 온 집안에 난리가 난 사건을 두고 붙인 제목이다.

  유명한 TV드라마 작가 김수현씨가 써서 인기가 높았던 어느 연속극에서, 엄마가 “1년 간 휴가를 달라”고 요구해, 그 때 국민들이 오랜 관습을 깬 이 의외의 혁명적인 발상과 발언에 놀랬던 일이 있었지만, 그런 휴가 요구사건과는 성격이 판연히 다르다.

 생각하기조차 끔찍하지만, 만약에 그래 만약에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신 것이라면 앞으로 집안은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출가도 안 한 세 자식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60세 어머니는 재혼을 해야 하는 건지(이건 1초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한 일),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평소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당장 실종신고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유서도 안 만들어 두셨을 텐데…. 

 이것은 가족으로서는 매우 고민스러운, 엄연한 현실이요 사고다. 분명, 발전소가 전기를 잘 생산하다가 갑자기 고장이 난 Trip이다. 발전소 엔지니어들이 사고수습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초 긴박 상황과 똑 같다.


아버지….

꽁트를 쓰는 나도 한 여자의 지아비요, 세 아이의 아버지지만, 그거 해보니 그 동안 참 고단했고 지금도 고단하다. 그래서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참 보고 싶다. 특히 형제들이 많아도 성품DNA는 고스란히 내게 물려주신 아버지이신지라 이렇게 눈물이 나도록 그립다. 

살아계셨더라면 좋아하시는 막걸리, 아 요즘 인기 짱 막걸리, 수출도 많이 하는 그거, 많이 사 드릴 수 있는데….

연속극의 그 엄마처럼 늘 그렇게 그 자리에서, 가족들의 불평과, 남편의 퉁명스러움과, 시어머니의 뼈아픈 구박과, 시댁 가족들과의 참기 어려운 마찰에 견디며, 늘 마음에 받아들이는 엄마의 자리 못지않게, 아버지라는 직책도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버지니까 과묵하여 그렇지, 피곤하고 그런 게 아버지인 것인데. 그래. ‘아버지의 눈물’이라는 말도 있잖아. 아버지니까 좀처럼 흘려서는 안 되는…. 아버지니까 좀처럼 쉬어서도 안 되는, 그러나 아버지도 좀 쉬고 싶을 때도 있지. 암 잇고 말고. 실종된 그 아버지도 잠시 동안 좀 쉰 것일까?


반복하지만, 사건은 이렇다.

어느 날, 어느 아버지가, 저녁 때도 안 되어 친구를 만나러 나가서 17시간 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다. 평소 몸도 안 좋은데, 주머니에 돈도 좀 지니고, 카드도 많이 가지고 다닌다. 버릇처럼 손 가방도 들고 나갔다. 정황은 충분히 사고감이다. 

 밤이 늦어지자 부인과 자식들이 휴대폰에다 계속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뿐. 밤을 꼬박 샌 가족들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 아버지 친구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엊저녁에 어떤 친구를 만나셨는지 우선적으로 확인해야 했는데, 가족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집에 모아둔 청첩장을 뒤져, 평소 아버지와 친한 친구의 전화번호를 겨우 알아냈다.

 평소에 건강이 무척 안 좋은데, 술을 많이 드시면 큰 일 나는데,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집에 안 들어오신 적이 없는데, 요즘 회사 문제로 심리적으로도 무척 고민이 많은데, 어머니는 넋두리처럼,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복받친 목소리로 아버지 친구에게 전화하였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 친구는 다른 여러 친구에게 수소문하고, 그 친구들은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하고, 그래서 아버지의 Trip 전화는 순식간에 서울의 하늘을 울려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애쓴 보람 있어, 엊저녁을 같이 하신 친구를 찾았지만, “집에 안 들어왔어요? 어제 밤에 지하철 타고 집으로 간다고 헤어졌는데요”라는 대답, 왜 연락이 안 되는지 더 이상 정보를 얻을 수 없어, 그 사람을 찾기 전이나 후나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제 오전 여덟 시를 넘기고 아홉 시가 되면서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냐 마냐 하면서도, 아버지의 사회적 신분을 생각해서, 만일에 혹시라도 무슨 안 좋은 일에 연루되었다면 명예에 걸린 문제이니 어쩌나, 스치는 걱정 때문에, 신고하기에도 주저되는 행방불명. 

망설이다가 119에 휴대폰 위치추적을 의뢰했더니(119에서는 전화위치추적서비스를 해 준다는 사실도 이 가족은 처음 알게 되었지만), 위치는 알아냈는데, ‘반경 2km의 정확도’ 밖에는 안 된다니, 감은 잡아도 찾는 건 막막했다. 위치를 대강 파악하고 나니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왜냐하면 신호가 잡힌다는 그 지역 일부에는 유명한 유흥가가 자리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디서 퍽치기를 당하신 건 아닌지, 혹 어느 여인의 꾐에 빠지신 건가, 가방은 왜 들고 다니는지, 카드시대인데 현금은 왜 많이 지니고 다니는지, 하필 유흥가 골목이 있는 곳이람…. 밤에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 노린다고 하던데, 아침 아홉 시면 그래도 잠에서 깨셨을 텐데, 어디 골목에서 쓰러져 있는 건 아닌지, 아니지 아홉시면 훤한 대낮이니 그랬다면 사람들이 보고 벌써 신고했겠지, 여태 경찰에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사고는 아니겠지….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친구들은 친구들대로 다들 이러다가 정말 문제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어머니는 112신고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 때가 열 시. 전화를 걸려는 그 순간에 아버지가 멀쩡하게 집으로 들어오셨다. Trip 은 종료되고, ‘가정 발전소’는 다시 가동되었다. 


독자들께서 궁금하실까 봐 밝히는 사실인데, 어제 밤 아버지는 그 친구분들과 헤어져 집으로 오는 도중에, 우연히 전에 다니시던 회사 동료를 만났고, 2차에서 약주를 많이 하다가, 진짜로 몸도 기억도 다 잃은 Trip이 되어, 무조건 가까운 여관에서 자고, 아침 늦게 깨어나셔서 곧장 집으로 들어오셨단다. 


오후 다섯 시에 친구를 만나 열 한 시면 그만 몸도 안 좋은데 집으로 들어 오셔야지, 밤에 못 들어오시면 그렇다고 연락이라도 하셔야지, 위치추적에서 왜 하필이면 유흥가가 잡히냐, 거기서 뭐하셨냐, 누구랑 주무셨냐, 연락을 못하실 사연이 뭐냐, 옛 동료도 같이 Trip되셨냐, 그분이 누구냐, 그분이라도 우리 집에 연락해 주어야지, 차라리 병원 응급실에 가시든가, 그 술집에서 주무셨다는 거냐, 아침에 정신차렸으면 전화부터 해야지, 돈은 어찌 되었냐, 누구에게 뭣을 당하신 건 아니냐, 그 옛 동료라는 분도 같이 잤냐, 아침에 같이 헤어졌냐, 식구들 걱정하는 줄 모르셨냐?


아버지의 트립 미스터리는 미심쩍은 부분이 되게 많았지만, 꼬치꼬치 캐 묻는 사람 아무도 없이, 아버지의 기능이 다시 발휘되면서, 무대의 모든 것을 가리는 막이 내렸다. 어머니도 많은 의문과 의심을 가졌지만 이런 식으로 묻지도 않고 아무 말없이 백화점 모임에 가고, 아들들은 지각이지만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직장에 나갔다.

아버지 친구들은 “그래 괜찮어? 야, 난 꼭 송장치르는 줄 알았잖아? 그런데 좀 티 안 나게 하면 안 돼?”라면서, 웃으며 전화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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