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28. 2022

프로 의식---직분을 확실히 수행

프로 의식---직분을 확실히 수행

 

우리 주변에는 직업에 충실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었는데, 금세 잊어버린다. 예전에 써두었

던 글에서 직분과 관련된 몇 가지를 찾아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그리고 금방 잊어버리지만, 담

당자들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태도가 회사와 사회를 건전하게 만든다. 아울러, 직분을 망각하

는 일이 없도록 본분을 다해야 한다.

 

보일러 Clinker 떼기는 기본 직무

아주 옛날 구식 발전소로 이미 폐지된 삼척화력발전소나, 요즘의 최신 초초임계압 보일러나, 보일러 점검창을 열고 거기 붙어있는 딱딱한 탄재 덩어리를 떨궈내는 일은 Operator의 기본직무다. 무연탄을 때서 탄재가 엄청 많이 생기는 보일러나, 회분이 좀 적은 역청탄을 때는 신식 보일러나 기본이 달라진 것은 없다. 점검창 부근에 형성된 Clinker(크고 딱딱해진 탄재 덩어리)가 크게 성장하여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사고도 나고, 무엇보다 이것을 처리하지 않고는 연소되는 보일러의 내부 점검이 안 된다. 주기적인 보일러 내부점검 또한 Operator의 기본 의무로, 직무유 기하면 안 된다.

 

1968년. 삼척화력에서 한 밤중에, 차장님도-주임님도-버너 운전원도-기능공 Helper도 함께 힘을 합쳐, 큰 맨홀을 열고, 수 미터짜리 긴 쇠 창살로 Clinker를 떨궈냈다. 안전모 밑으로 줄줄 흐르는 땀을 목에 두른 수건으로 연신 닦으며 창을 쑤시는데, 갑자기 훅 뿜어 나오는 불길에 빨리 몸을 피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한전의 사원이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하얀 넥타이 매고 멋진 빌딩의 에어컨 켜진 책상에서 근무하는 은행원과 처지를 비교하여 신세를 낙담하면 안 된다. 이것은 현재 나의 일이고, 나는 이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나 이 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점,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나중에는 멋진 사무실 책상에서 근무할 수 있으니, 보일러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이를 막을 수 있는지 깊이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 날이 창창한 사원이 잠시의 귀찮음으로 몸을 아끼는 것은, 지하철에 앉아 있을 때 앞의 교통 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그런 양심의 문제와도 다르다. 프로가 되기에는 싹수가 노란, 아마추어도 그런 형편없는 아마추어는 없다.

 

매일 닦는 변기 1979

  일본 연수 때 목도한 일. 일본 이바라키현 히다치(日立)제작소의 독신자 숙소(5층 건물)에 머물던 때 얘기다. 여기에는 독신자들이 많아서 너저분할 경우도 있겠지만, 외출이 많으니 청소할 일도 별로 없기도 한 곳이다.

 이곳에 아주머니 5명이 한 층씩 맡아서 하루 종일 청소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든 변기와 욕조를 하루 한번씩 닦아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있었는지, 철저하게 그 규칙을 지키고 있었다. 

 책상 위에 돈을 놓아두어도 동전 한 닢 건드리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며칠씩 휴가를 가서 주인이 없는 방까지도, 누가 보든 안 보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받들어 매일 한 번 닦는 것에 게으르지 않았다.

 

폭설 속 출근

 눈이 1m 70cm나 내려 사람도 차도 옴짝달싹 못하던 1980년 경의 겨울 강릉시 영동 화력발전소. 

밤새 엄청나게 내린 눈으로 직선거리 2km밖에 안되는 발전소 사택의 백여명 직원들이 출근을 못하고 빤히 보이는 발전소를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런 판이니 30km나 떨어진 강릉 시내에 거주하는 직원들은 오죽했으랴!

 그러나 교대근무자 중에 아침 교대 정시에 출근한 직원이 있었다.

 강릉시내에 살던 이무부 (당시)주임과 김 모씨 두 명이었는데, 그들은 강릉 시내에 사는 사람들로서, 강릉 기차역으로 가서, 평상시에는 전혀 이용하지 않는 완행열차를 타고서, 발전소 바로 옆 ‘안인역’에 내려 출근했던 것이다.

그 소식에 다들 박수를 치면서도 많이 찔리는 게 있었다.


사족을 파묻은 소장님

 김영문 소장께서 모 발전소 소장을 맡았을 때, 건설한 지 얼마 안 된 그 발전소가 불안정하여 자주 발전정지가 되었다. 전체 직원들이 힘을 모아 열심히 문제를 처리해 나갔지만, 정상화에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어느 날 밤 소장께서는 총무부장을 대동하여, 한 밤중에 발전소에 들어가서, 본관 네 귀퉁이에 족발 하나씩을 땅에 파묻었단다.  

그날 이후로 이 발전소는 거의 고장 없이 잘 운전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다).


인정어린 직장 1989. 7 <사락배에 실은 글>

  職場을 말할 때 흔히들 平生職場이니 人生의 場이니 하고, 실제로 우리 한국전력공사는 한 때 ‘살맛나는 한전’을 만들자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反語的으로 말하면 오죽 살맛이 안나면 저럴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만, 그러니까 더욱 살 맛 나게 만들어야 하지요.

職場에 나가면 참으로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직장에 정말로 人情스러운 분위기가 있어야 합니다.  잘못을 꾸짖을 때 밑바탕에는 후배를 걱정하는 人情이 깔려 있어 심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벌을 줄 때도 인정을 바탕에 두고 주면 벌받는 사람이 감동하여 더욱 충성하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 바람직한 직장을 만들고 재미있는 직장을 만드는 길이라는 것이라 믿습니다.

격렬한 감정이 솟는 순간에도 인정을 잃지 말고 따뜻한 情으로 어루만지겠다는 생각을 하면 어려운 노사문제도 풀릴 것이고, 상하 간의 틈새도 없어지리라 생각합니다.

職場은 재미있어야 하고, 직장을 나가고(때려치움) 싶은 것이 아니라, 직장에 나가고(출근) 싶은 생각이 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땀은 설득력 <사락배에 실은 글>

일상사에는 가슴이 뭉클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땀 흘리는 모습만큼 감동을 주는 일도 드물 것입니다.  땅을 파면서 흘리는 땀에 젖은 노동자의 모습, 열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흘리는 땀, 운동하는 스포츠맨, 그리고 우리들처럼 시끄럽고 더운 곳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기계를 조정하고 수리하고, 또 머리를 짜내 기술을 쌓아가며 마음의 땀을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 이러한 모습들은 언제나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직분에 충실한 인간에 대한 한없는 신뢰감을 자아내게 하고,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는 설득력을 갖게 하기 때문에 매우 고귀합니다.

 발전소를 방문하시는 고객들에게는, 웅장한 규모의 발전설비에 감탄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 중요 사업이 어떤 노력으로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는지, 그것을 이해시켜 고개를 끄덕이게 함이 중요하다. 

전기요금 인하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전소에서부터 어떻게 열효율을 높이는지-이 큰 공장은 어떻게 에너지를 절약하는지-그리고 경영의 효율화를 위해 어떻게 작전을 짜서 땀을 흘리는지를 제대로 설명해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폭우 속 배수로 점검 ‘특공대’

모 발전소가 위치한 곳에 그 지역 역사상 최대라 기록될 만한 비가 내렸다. 발전소가 없었더라면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빗물이 바다로 바로 빠졌던 논인데, 아무래도 발전소 때문에 물이 잘 빠지지 않자 폭우 속에 농민들이 데모를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너무 많은 비가 오니 배수로가 감당을 못하고 논에 물이 차버렸다. 만조가 되면 이 현상은 더 심하게 된다. 우리는 데모대가 하던 행동을 유심히 살폈는데, 아무래도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특공대를 조직했다. 혹시 배수로에 구축된 철근 망에 ‘데모대가 뭘 집어넣어서 물이 잘 안 빠지게 하지는 않는지를 확인하여 제거하려는 ‘특공대’를 몇 명 조직하고, 내가 이끌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우의차림으로 점검을 나갔다.


우리는 데모대가 하던 행동을 유심히 살폈는데 아무래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특공대를 조직했다. 혹시 배수로에 구축된 철근 망에 데모대가 뭘 집어넣어서 물이 잘 안 빠지게 하지는 않는지를 확인하여 제거하는 ‘특공대’를 몇 명 조직하고, 내가 앞장서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우의를 입고 점검을 나갔다. 결국 농민들이 배수로에 담요와 이불을 던져 넣어 배수로 중간의 철망에 걸리게 해서 배수가 안 되게 시도한 사실을 발견했다. 물이 못 빠지게 해서, 배수로 둑을 아예 파손시킬 작정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수압과 물살이 너무 세어 이불이 걸린 철근 망 한 쪽이 파손되어 터져버린 것도 확인했다.

마침 농민들도 “왜 아직 둑이 넘치지 않나?” 하고 그곳으로 확인하러 왔다가 우리와 조우했다. 우리는 불상사를 피하려고, 뒤도 안 돌아보고 무조건 도망쳐 돌아왔다. 마침 비도 적게 내리고 간조가 시작되어 물도 잘 빠져나가 침수도 해소되었다. 농민들도 이불 사건이 있으니 더 이상 데모를 하지는 않았다. 

특공대원 차출 때, 거부한 간부도 있었지만, 나와 기꺼이 동행해준 우리 기계부 박건복 과장, 한전기공 이웅희 과장 등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가장 중요한 일

 근무는 시골서 하고, 서울에 내 집이 있던 시절에, 주민등록증을 새것으로 바꾸려고 서울의 동사무소에 들렀는데…. 

모든 수속이 다 끝나고 이제 사진만 두 장 제출하면 되는 판에 아차! 지갑에 넣고 온 줄 알았던 사진이 없는 게 아닌가.

 “깜박 사진을 잊고 왔는데 본인임을 이미 확인했으니, 나중에 우편으로 사진 보내줄 테니 좀 처리해 줘요” 라고 말했다.

 “선생님 말씀 다 잘 알겠습니다만, 사실 제가 맡은 일 중에 ‘본인 얼굴 확인하면서 사진을 붙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저의 중요한 일을 소중하게 여겨 주셨으면 합니다.”

동사무소 여직원은 정중히 거절했다. 나는 다음에 또 휴가를 내거나, 출장 올 때 짬을 내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나이 어려 보이는 그 여직원의 모습이 너무도 예뻐 보였다.


 신 삼고초려?

 삼국지에서 제갈량을 모시려 애쓴 삼고초려 얘기는 유명하다. 내가 현대엔지니어링에 ‘半 상근 기술자문’으로 입사하던 때, 나를 담당한 염흥수 상무는 나를 영입하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찾아와 극진한 대접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 삼고초려’라 이름을 붙인다면 좀 거시기 하지만, 나로서는 너무 고마워서 그러고 싶다. 하필 그 대상이 나여서 그렇지, 삼국시대도 아닌 요즘 시대에, 한 사람의 기술 자문을 영입하기 위해 애를 쓰던 염상무는 자기 직분에 매우 충실하였던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은밀하고 신속하게---전봇대와 말뚝 뽑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