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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28. 2022

위기 대처---Trip이 진짜로 여행이면 얼마나 좋으랴

위기 대처---Trip이 진짜로 여행이면 얼마나 좋으랴!

2003 


거대한 발전소가 잘 운전되다가 갑자기 불시정지(Trip)되면 발전소 내부에는 비상등만 남기고 전

기가 나간다. 중앙제어실의 수많은 경고등은 한꺼번에 깜박거려 점멸(點滅)하며 정신없이 울려댄

다. 운전요원 모두 가슴부터 덜컹 내려 앉는다. 모든 기기가 일시에 작동을 멈추는 순간에 운전

요원(Operator)이 해야 할 일은 ‘평소에는 정지되었다가 Trip 순간에만 운전되어야 하는 기기’가 

정상적으로 운전되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로부터 아수라장처럼 변하는, 발전소 엔지니어로서 

가장 당혹스러운 현장의 어수선한 상황들을 지휘하여 가지런하게 수습해야 한다. 


발전소 Trip

사람이 살다가 당하게 되는 험한 꼴의 종류도 여럿 있다. “시체를 보지 않고 사는 것은 복”이라는 말도 있는데, 살다 보면 점점 나이를 들면서 그런 경우를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조부모, 부모님을 위시해서 가족과 친척들의 죽음은 점점 다가오기 때문이겠다. 

또, 자신보다 자식을 앞세우는 경우라면 얼마나 험한 꼴이겠는가! 자식이 버젓한 직업이 없거나, 사업이 잘 안 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험한 꼴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외에도, 인생에서 어디에 가치관을 두는가에 따라 험한 꼴의 종류도 달라지겠는데, 나에게는 ‘발전소가 불시 정지되어 죽어 자빠진 모습을 보는 것’이 아주 험한 꼴이라 할 수 있다.

요 이틀 사이에 발전소 하나가 두 번이나 그 꼴을 내게 보여주었다. 36년을 발전소와 함께 살면서, 저런 꼴 본 게 어디 한두 번이라야 어떡하지. 그래도 새삼스레 저 꼴 보기 싫은 것은 왜일까? 

평직원 신분에서부터 현장을 지휘하는 계장, 부장, 부처장을 지나 처장을 하면서 참으로 수십 번 당하면서 겪은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직접 책임에서 간접 책임까지, 질책과 질타…. 

 생각하면 감회가 서린다. 30년 전 모 발전소에 근무할 때는 사흘도리(자주) 당하였는데, 이제는 각고의 노력 끝에 설비가 차츰 신뢰성이 높아져서 고장횟수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어쩌다 겪는 불시정지 Trip, 고장정지는 가슴을 아프게 한다.


방금까지도 평화롭게 전기를 생산하더니, 갑자기 발전소 조명등이 일부만 남기고 다 꺼지고, 중앙제어실 경보판의 온갖 경보가 울리면서, 발전기가 전력계통에서 덜컥 떨어져 나간다. 

책임자인 나로서는 그냥 제어실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 되지만, 수습을 위해 지휘를 해야 한다. 일시에 칵 숨을 거두는 건 차라리 낫다. 죽은 자식 불X 안 만져도 되니 말이다. 

반면에 요게 한 30분 시간을 끌면서 숨이 넘어가는 꼴을 보는 건 정밀 피가 마르는 일이다.

상황판단을 하랴, 어디 가서 무슨 밸브를 닫아라, 열어라 페이지 폰이 터지도록 소리도 지르고…. 온통 벌겋게 바뀌어 깜박거리는 중앙제어실의 경보판, 상황을 기록하는 Data Logger의 활자 찍는 소리, 동네가 시끄럽게 불어대는 안전변(소음기 없던 시절), 마구 새 나오는 고압 수증기, 시끄러워 도무지 말을 할 수 없는 현장, 온통 먹통이 된 공장 안을 랜턴을 들고 목적한 밸브를 찾아 뛰어야 하는 사원들, 무엇부터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초보 지휘자도 더러 있고, 모든 것을 수동으로 지령하던 시절의 본사 중앙 급전 지령소 전화는 목이 터져라 울어대고, 지원부서와 협력회사원 수 십 명이 몰려와서 웅성거리고, 고함도 지르고 신경질도 내고, 보고계통에서는 그 와중에도 전화로 “원인이 뭐냐?”, “언제 복구될 거냐?”고 꼬치꼬치 물어대니 궁색한 답변에 진땀을 빼다가, 성질이 나서 그 와중에도 말싸움을 하기도 하고, 원인을 찾아야 다시 가동하든지 말든지 하지... 이 쪽 저 쪽에서 원인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고, 원인을 알고 나면, 바로 전력계통에 복귀할 수 있는 가벼운 고장인지, 사흘이고 열흘이고 시간이 필요한 일인지, 복구계획 짜랴, 복구에 쓰일 자재 확인하랴, 자재는 창고에 있는지 없는지, 양은 충분한지, 수리할 인력은 있는지…. 한 밤중에 사택에서 단잠을 자다가 불려 나갈 때는 아빠의 심각한 얼굴을 보며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는 아내의 가슴 졸임. 놀랜 아가는 이 밤에 소리 질러 울고….


확실한 교육과 강력한 훈련

그래도 발전소가 연관 기기의 사고 없이 순조롭게 Trip이 된다면, Trip은 되더라도 그나마 불행 중 다행한 

Case인데, 이것이 만약 화재나 폭발, 고착 등이 일으킨 Trip이면 정말로 몇 달 동안 발전소를 세워서 복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에 Trip을 수습하는 과정에 경험 없는 Operator가 당황하여 잘못 조작을 해서 생긴 경우라면, 이것도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훈련이 안 되었거나 경험이 적은 일부 사람은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심 속에서 극한의 행동을 할 수 있다. 아무 거나 스위치란 스위치는 다 돌려보고, 버튼은 다 누르는 것이다. 이미 기능을 상실하여 정지되어 있는 기기의 스위치는 누른다고 해서 다시 돌아가지는 않는데, 문제는 비상 비상을 맞아 제대로 잘 운전되고 있는 것조차 눌러서 꺼버린다는 것이다. 이 때 걷잡을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런 오 조작을 막기 위해 평소에 집합교육과 가상고장 모의훈련은 발전소 Operation업무의 핵심이 된다. 


발전소에서 Emergency상황은 여러 경우가 있는데, 과거에 일어났거나 또는 예상되는 각각의 비상에 대처할 방법을 모르는 사람을 발전소 실무에 투입하면 안 된다. 그래서 Trip상황에서 이성을 잃지 않고-해야 할 일을 암기하고-확인하고-조작하고-지시하는 의연한 자세를 갖도록 훈련을 평소에 자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이 부족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상기하기도 싫은 “상기하자 OO사고”다. 

적을 눈 앞에 두고도 총을 쏘지 못하거나, 조준을 잘 못한다면, 조준은 잘 해는데도 명중이 안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무릇 Operation을 맡은 사람은 기본지식 암기는 눈에서 피가 나도 외워야 하고, 늘 가상고장 상황을 상정해서 자기가 할 일을 숙달시켜 두어야 한다.


사무직이 기술직을 보는 눈이 달라진 Trip 

1985년경.  몹시도 춥고 또 춥던 한 겨울 어느 날.

 밤중에 1호기가 덜컥 Trip되었다. 배관 하나가 얼어 터져서 생긴 일로 밝혀졌다. 

발전소 사택에 비상이 걸려 지원부서 사람들이 회사로 급히 들어왔는데, 그 때 이경삼 (당시) 연료부장을 위시해서 많은 사무직(非엔지니어) 간부들도 놀라서 같이 오셨다. 이부장님은 “발전소 엔지니어들의 일에 관심이 많았고, 사무직도 이럴 때 뭔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신없이 상황수습을 하고 있는데, 아니지. 정신 바싹 차리고 상황을 처리하고 있는데, 웬걸? 2호기도 똑 같은 문제로 Trip한다. 쌍둥이 Trip이다. 두 호기가 똑 같은 구조이니 이따금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날은 날이 너무 너무 추워서 보온이 부실했던 ‘정체된 물 배관’이 1,2호기 똑같은 Point에서 얼어 터진 것이다.

 그날 밤 우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하는 일을 유심히 살펴본 사무직 직원(비 엔지니어)들이 기술직(엔지니어) 직원들, 특히 Operator들이 하는 일을 많이 이해하려 했고, 이후에는 무엇이든 도와주려고 하신 일을 늘 고맙게 생각한다. 그날 이 부장님이 맛있는 야식을 주문해 주셔서, 울컥 감사한 마음을 가진 Trip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Trip은 안 일어나는 게 훨~ 더 좋다.


불시정지를 막아라

발전소가 불시정지하는 일을 영어로 ‘Trip’이라 하는데 Trip은 여행이라는 의미로 중학교 때 머리에 각인되었다가, 발전소에 일하고부터는 여행보다는 불시고장을 뜻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Trip이 여행이면, 다람쥐 쳇바퀴 돌던 일상생활에서 빠져나와 여행하는 것인 것처럼, 발전소가 전기생산을 아니하고 딴 짓을 하는 것도 일종의 여행인가보다. 발전소가 Trip될까 봐 언제나 긴장된 자세로 조마조마하게 마음 졸이고 살아온 36년. 

지금도 나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전국의 발전소에서 이런 일을 많이 겪고서, 불시 정지이건, 계획적인 정지이건, 사고가 일어나서 하는 정지이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예방하는 기술’이 매우 소중하게 되었다.

한전과 발전회사에 전국의 많은 고급 엔지니어들이 채용되는 이유는 이런 일에 지혜를 모으라는 것이고, 그러함에도 고급인력조차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통계나 계산, 감시 사각지대 감시 등을 인공지능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다.

 AE회사-주기기 제작사-시공사 들도 발전소를 건설할 때부터 무엇을 해야 이런 불시정지를 막을 수 있을지 그 포인트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안건이다.

쇠 파이프나 쇠 기둥 그리고 철근 등으로 덩치를 크게 만드는 일은 이제는 우리나라도 상당히 잘한다. 우리는 머리를 잘 써서 발전소 불시정지를 막는 일도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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