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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아빠 Oct 26. 2022

원나라 교포 5세 이성계, 그는 과연 고려 사람일까?

이성계 가문의 역사

이성계 초상화 - 조선태조어진 (朝鮮太祖御眞),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이성계의 가문은 대대로 전주 지방의 호족이었다. 그런데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중앙에서 파견된 산성 별감(山城別監)과 관기(官妓) 때문에 다툼이 생겨 삼척을 거쳐 간도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때 그를 따르던 170여 가구가 함께 이주했다고 한다. 이안사는 동북면(東北面, 함경도 남쪽과 강원도 북쪽으로 구성된 고려의 행정구역)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세력을 형성했기에, 고려에서는 그에게 원나라의 침략을 방어하라는 임무와 함께 관직을 주었다. 그러나 이안사는 1254년에 원나라의 회유에 넘어가 조국을 배신하고 원나라의 다루가치가 되었다. 다루가치는 원나라가 고려의 점령 지역에 두었던 관리직 벼슬이다. 

 

이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 증손자 이자춘(李子春)은 모두 이안사가 가졌던 지위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성계의 선조들은 모두 이안사의 뜻을 물려받아서 원나라에 귀화해 벼슬을 대물림하고 몽골식 이름을 사용했다. 이성계 가문은 당시에 국경 지역에서 원나라에 포섭되거나 투항한 친원파 중 하나였다. 

 

친원파란 고려를 떠나 힘이 강력한 원나라에 붙어서 자신의 앞길을 도모하던 세력들이었다. 조선 후기에 조국을 팔아먹는데 앞장선 친일파가 있었다면 고려 후기에는 그들보다 앞선 친원파가 있었다. 친원파는 자신의 딸을 원나라 왕족에게 시집보내서 권력을 잡으려고 애썼던 무리들이 있을 정도로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원나라의 관리가 되어 조국인 고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성계의 가문도 그들과 같은 친원파였다. 그리고 이성계는 원나라 교포 5세였다. 그는 100년이 넘도록 원나라의 관리를 지내던 가문의 자손이기에 고려의 피가 남아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울루스부카(吳魚思不花, 이자춘의 몽골 이름)는 이성계의 아버지로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함경도 남쪽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원나라의 지방 관리로 살아왔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의 땅을 수복하려 했을 때 이성계와 같이 고려에 협력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공민왕은 이자춘을 고려의 관리로 임명했다. 당시에 고려의 관료들은 이자춘을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관리 임명에 반대했지만, 왕의 뜻은 완고했다. 

 

이성계 가문은 국제적인 권력을 좇아 고려의 국적을 포기했다가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이들은 몽골식 이름을 버리고, 변발했던 머리는 다시 고려식으로 길렀다. 이성계의 집안은 국제 정세에 밝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고려의 귀족 관료들 입장에서는 완벽한 기회주의자 가문으로 평가될 뿐이었다. 이성계는 아버지가 죽자 고려의 관직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렇다면 변방의 장수이자, 친원파의 후손이었던 이성계는 어떻게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서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다음 편에 계속......



 - 위 내용은 『사사건건 경복궁』의 일부를 발췌하여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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