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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아빠 Oct 12. 2022

경복궁으로 담아낸 조선의 역사책을 쓴 이유

『사사건건 경복궁 - 궁궐 길라잡이, 조선 역사의 빗장을 열다』머리말


 을미사변(乙未事變)은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다. 일명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범죄는 일본 제국주의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야욕에 눈이 멀고 그릇된 애국심에 세뇌된 자들의 집단적 광기가 분출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조선이라는 엄연한 주권국을 잔인하게 희롱한 국가 범죄이자 침략 행위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범죄 행위로 처벌받은 일본인은 단 한 명도 없다. 


 당시 히로시마 재판에 회부된 일본인은 총 48명이었다. 을미사변을 지휘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포함한 외교관, 경찰, 신문 기자, 의사, 작가, 교사 그리고 낭인으로 알려진 구마모토 출신의 민간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재판정에 호출되었다. 심지어 만 18세 소년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군인 신분으로 가담해 별도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장교 8명도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재판은 형식적 절차일 뿐이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을미사변이 일본의 국가적 범죄라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일본이 어떻게 그토록 쉽게 명성황후를 죽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갔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종을 호위하는 부대에 몸담았다가 사건을 목격한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경복궁에는 군인 1,500명과 장교 40명이 주둔해 경비를 맡았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치열한 전투도 없이 손쉽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했다. 경복궁 밖에는 총성에 놀란 조선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만, 일본인들은 삐뚤어진 애국심을 자축하며 유유히 광화문을 통해 걸어 나왔다.



 이 책은 경복궁(景福宮)을 출입구로 삼아 조선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사건의 결과보다 원인과 과정에 신경을 썼다. 역사에 대한 단편적 지식보다 전체 맥락이나 흐름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정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결과는 지식일 뿐이지만 진솔한 과정을 보태면 자극이나 감동으로 확장된다. 경복궁은 조선의 성장과 소멸을 묵묵히 지켜본 목격자이자 이야기보따리다. 하나의 국가가 새로 생기고 사라지는 힘의 방향성을 추적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장소는 없다.


 역사에서 이야기의 주인은 사람이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일도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모두 사람에게 달렸다. 이런 이유로 경복궁의 진정한 힘은 그 안에서 활약했던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이 책으로 떠나는 여행의 출입구는 경복궁이지만 이야기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핵심 요소가 바로 사람인 까닭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의 발자취에는 특별한 점이 많다. 선이 굵은 개인의 삶은 국가의 운명과 맞물리며 시대가 흐른 뒤에도 그 영향력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비주류라는 환경 요인을 뚫고 과감한 길을 택했다.


 교포 5세의 신분으로 몽골 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나 몽골인처럼 살다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李成桂). 지방 말단 관리 가문에서 태어나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데 앞장선 정도전(鄭道傳). 내시로 시작해 건축가로 인정받아 종 1품 관직을 재수받은 박자청(朴子靑). 유녀(遊女) 출신으로 종 3품 후궁이 된 장녹수(張綠水). 궁녀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식 왕비가 된 장옥정(張玉貞). 홀어머니와 살다가 16세에 왕비가 된 민자영(閔玆暎).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명문가의 양자로 들어가 신세를 바꾼 이완용(李完用)…. 


 오늘날에도 여전히 변형된 신분제가 존재한다. 평등이란 사전에만 있는 단어처럼 느껴진다. 주류를 따라야 한다는 사회 통념이 개성과 창조성을 수시로 억압한다. 따라서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 위를 다른 보폭으로 살아갔던 그들의 발자취는 지금도 유효하다.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들은 교감과 영감의 대상으로 날마다 새롭게 부활한다. 


 나는 16년 동안 자원활동가로 경복궁에서 해설을 해왔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관람객과의 교감이었다.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외우는 죽은 역사가 아니라, 우연히 놀러 온 경복궁에서 살아 있는 역사를 마주친 관람객과 나누는 교감은 나에게 따뜻한 기운을 안겨주었다. 해설을 듣기 전과 들은 뒤, 달라진 눈망울을 수없이 보았다. 그들은 역사가 과거의 조각이 아니라 오늘날 자기 자신과 이어진 흥미진진한 현재라는 사실을 느끼는 듯했다.


 단 한 번 해설을 듣는 것만으로 사람이 바뀔 수 있을까? 가능하다. 바로 내가 그랬다. 우연히 접한 궁궐길라잡이의 해설을 듣고 내 인생이 달라졌다. 중간부터 들었는데도 그날의 해설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역사를 알지도 못했고 전혀 관심도 없었지만, 난 어느새 궁궐길라잡이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역사책까지 쓰게 되었다. 이 책은 평소에 해설하면서 많은 사람이 흥미로워한 부분과 시간 제약 탓에 얘기하지 못한 부분까지 모두 담았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이 책과 경복궁을 통해 진짜 역사를 알아갔으면 좋겠다.  




 2022년 10월은 저의 책 『사사건건 경복궁』이 세상에 나온 지 만 1년이 되는 달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세종도서 교양 부문에 저의 책이 선정되는 영광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기념하고 많은 분들께 살아 있는 역사를 전달하기 위해 경복궁과 조선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하려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복궁 - 궁궐 길라잡이, 조선 역사의 빗장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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