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_EP5. 공백기라는 이름 아래 있었던 좌절과 위로

1장. 멈춘 줄 알았던 시간은 사실 멈춰 있지 않았다.

공백기라는 말은 이상하게도 중립적으로 들린다.

잠시 쉬고 있는 시간, 다음을 준비하는 구간.

하지만 그 안에 실제로 들어가 살아보면, 그 말은 거의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 시간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그보다는, 아무것도 통과되지 않는 시간에 가까웠다.


이력서를 써서 몇 군데에 넣어 보던 때가 있었다.

대단한 회사도 아니었고, 조건이 좋은 자리도 아니었다.

‘이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곳들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연락 없음, 혹은 형식적인 탈락 메일.


일단 뽑히기만 하면 일은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더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무엇이 부족했는지 들여다보려 하면,

마음이 먼저 닫히는 느낌이 들었다.

경력 칸을 채울 때마다 손이 멈췄다.

무엇을 했는지보다,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가 더 또렷하게 보였다.

한 건 많은데 내세울 건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공백 앞에서,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사소한 제안들 앞에서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 제안조차 고마워 나를 거기에 맞추려 하다가도,

‘이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뒤따라왔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스스로를 설득해야 했다.

하지 않으면 놓칠 것 같았고,

하면 오래 남을 후회를 떠안게 될 것 같았다.


집 안에서도 작은 균열은 생겼다.

크게 다투지는 않았지만, 미묘한 온도 차이가 계속 남아 있었다.

나는 나름의 계획을 불잡고 있었지만 점점 조급해졌고,

그 조급함은 말보다 먼저 표정과 태도로 드러났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잖아.”

“나중에 일하면 되잖아.”

그 말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나중’이 나에게는 너무 막연하게 느껴졌다.


가장 힘들었던 건, 남들과의 비교보다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완전히 내려놓은 적은 없었는데,

아무것도 되고 있지 않다는 감각이 따라다녔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래도 이만큼 했잖아”라는 말도,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지”라는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

그저 하루를 버티는 데 에너지를 쓰는 날들이 이어졌다.

겉으로 보기엔 조용했지만,

안에서는 계속 무너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력서를 잠시 덮어두더라도,

공부를 멈추거나 생각을 끊어버리지는 못했다.

의미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일들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희망이라기보다는 습관에 가까웠다.

일을 중심으로 살아왔던 시간들이 몸에 남아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나 자신을 붙잡아 둘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주 작은 계기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우연히 읽은 글 한 줄,

아이에게 설명하다가 문득 느낀 감각 같은 것들.

그때는 그것들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순간만큼은

‘아직 나 안에 남아 있는 게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기에는 위로를 받는 일도 쉽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다 돌아올 거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럴까요?”


공백기라는 이름 아래 있었던 시간은

좌절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확실한 방향도, 눈에 띄는 성과도 없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던 시간이었다.

나는 계속 흔들렸고, 자주 무너졌지만

그럼에도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몰랐다.

이 시간이 어떤 의미로 남게 될지,

어디로 이어지게 될지.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멈춰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완전히 정지해 있지는 않았다는 것.


그 깨달음은 훨씬 나중에야 찾아왔다.

이제야 나는 그 시간을

‘아무것도 되지 못한 시기’가 아니라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시간’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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