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간 이의선]
잠 속을 헤매다 발치에 닿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털 뭉치에 살그머니 다리를 고쳐 잡는다. 새근새근 잠든 털 뭉치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가만히 다리를 고정하고 상체를 일으켜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고운 털이 갖가지 방향으로 뻗쳐 있다. 하얀 배를 드러내며 세상모르고 자는 이 애는 나의 고양이 오트다. 오트는 이제 2살이 된 숙녀 고양이다. 나와 만나기까지의 시간들이 지난한데 그 시간이 대수랴 너와 내가 만나려고 이미 정해져 있던 운명이라 생각한다. 오트는 거리에서 태어난 스트릿 고양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어느 철물점 주인이 묵직한 그물망을 거리에 내놓았다. 철물점 아저씨는 진절머리를 치며 고양이가 창고 안에 새끼들을 싸질러 놨다고 했다. 그 앞을 지나가던 청년이 그 소란을 지켜보았다. 그물망 안을 들여다보니 여러 새끼 고양이들이 서로 엉켜 있었다. 그중 가장 작은 고양이가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다. 꼬리가 꺾이고 털색마저 희끄무레한 작은 고양이였다. 청년은 철물점 아저씨한테 양해를 구했다.
"이 작은 애만 제가 데려갈게요. 죽으면 어째요."
아저씨는 아기 고양이를 가져가든지 말든지 관심 밖이었다. 잘 키워서 건강해지면 농막에 들끓는 쥐잡이용 고양이로 만들 심산이었다. 주황빛이 도는 고양이어야 할 터였는데 그 애를 만들다 조물주의 주황색 물감이 똑떨어진 모양이었다. 뿌연 베이지색 털이 어쩐지 먼지 같기도 하고 어쩌면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이름도 없이 쥐잡이 고양이로 길러졌다.
어린 쥐잡이용 고양이는 집 안에서 빼액 빼액 울어댔다. 따끈한 구들장에 눕혀주어도, 배불리 밥을 먹이고 자리를 펴줘도 빼액 빼액 울며 발치에 차이게 따라다녔다. 아직 똥오줌도 혼자 못 보는 새끼 고양이었다. 거리에 두면 죽을까 데려왔는데 손 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푸념을 늘어놓았다. 쥐잡이용 고양이 키우려다가 일거리 다 끊기겠어. 전화를 받은 친구는 시큰둥하게 실험실 책상 모니터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줬다. 고양이 사진이나 보내줘 봐. 큰 방에 깔린 두껍고 커다란 이불 산에 콩알만 한 얼굴이 삐죽 나와 있었다. 딱 보기에도 태어난 지 며칠 안되어 보이는 새끼 고양이였다. 그 애의 눈빛은 유약했으나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단단해 보였다. 친구는 뒷자리에 앉아 있는 실험실 후배에게 사진을 보여 주었다. 요즘 따라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애였다. 사진을 보여주자 후배는 이미 그 희끄무레한 새끼 고양이에게 한눈에 반해 버린 것 같았다. 후배는 휴대폰을 낚아채 검지와 엄지로 사진을 연신 늘렸다 줄였다 하며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오트에게 반해버린 순간이다.
우리 집에 온 오트는 첫날부터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분유를 따뜻한 물에 개 종지에 담는 와중에도 얼른 내놓으라며 빽빽 소리를 내 울었다. 그 작은 몸에서 대체 어떻게 그런 큰 목소리가 나오나 기가 찼다. 허겁지겁 분유를 먹는 오트 곁을 지키며 생각했다. 이 집이 반려동물이 살아도 되는 집이 맞는지 고양이를 키우려면 얼마 큼의 돈이 필요한지 말이다. 그때 나는 먼 타지에서 홀로 자취를 하던 중이었고 대학원생 신분이라 지갑 사정이 넉넉지 않았었다. 하물며 고양이가 모래에 똥을 싸는지조차 몰랐던 일자무식 상태였는데 한 생명을 덜컥 책임지게 되어 불안이 몰려왔다. 어찌 되었건 이 집에 생명이 둘이나 있다는 건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 기척이 불편했다. 매일 혼자 생활하던 공간에 나의 움직임 말고 다른 이의 기미가 느껴지는 것이 생경했다. 손바닥만 한 오트는 밥을 있는 대로 먹고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내 얼굴 옆에 누워 잠을 잤다. 혹시나 그 배가 터지진 않을까 자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곤 했었다. 아직 아기라 혼자 똥을 싸지 못해 오트를 한 손에 들고 물티슈로 항문을 닦아 똥을 누게 해야 했다. 완전히 성숙되지 않아 파랑과 회색이 섞여 있던 눈을 들고 아기 오트는 집 안 이곳저곳을 누볐다. 입 주변에 분유 자국을 묻힌 채 침대에 누워 곤히 자던 오트는 이제 다 큰 어른 고양이가 되었다. 밝은 머스터드 색이 까만 동공을 감싸고 있는 성묘의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오트가 아직 손바닥만 할 때 엉아 고양이 호미가 우리 집에 왔다. 겁이 많은 호미는 우리 집에 도착해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오트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엉아 고양이를 만난 것이 묘생 처음인 오트는 그의 모든 행동이 신기했고 부러웠다. 그의 좋은 풍채도 놀랍고 자신과 다른 긴 꼬리도 멋져 보였다. 호미는 길에서 자란 스트릿 고양이다. 내 연인이 구조한 호미가 우리 집에 살게 된 것은 우리가 서로의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레 결정되었다. 갈색과 회색 털이 섞인 등에 검은색의 점이 콕콕 찍혀있는 고등어 태비 호미는 올리브색 눈을 가졌고 가로로 긴 얼굴 덕에 누가 봐도 귀여운 고양이다. 우리 집 곳곳의 식물을 씹어 놓고 토분은 주저 없이 깨뜨려버리는 그 때문에 나는 모든 식물을 밖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이후 좋아하던 식물은 포기해야 했지만 호미가 나에게 마음을 내어 주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순하디 순한 우리 엉아 고양이는 샤워하고 나온 엄마 얼굴을 핥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오트가 혹시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다 사고 치진 않을까 늘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는 오트의 든든한 오빠이기도 하다. 이제 육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호미가 매일 저녁 내 무릎에 올라와 뱃살을 앞발로 꾹꾹 안마해준다. 그럴 때마다 뱃살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뱃살이 없었다면 이 호사를 어디 누리겠는가.
여름이 오면 호미오트의 연중행사가 시작된다. 첫째, 스케일링과 건강검진. 둘째, 목욕. 마지막으로 심장 사상충 약 접종이다. 며칠 전 서울에 와 처음으로 그들을 데리고 동물 병원에 다녀왔다. 어찌나 난리를 피우는지 혼이 쏙 빠졌다. 차를 몰고 병원으로 이동하는 중 오트가 가방에서 나와 차 안을 휘젓고 다녔다. 목청 높여 우는 그 소리가 걱정돼 운전에 집중이 안되었다.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마취가 풀리지 않은 그들의 가슴팍이 정상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지 곁에 앉아 확인해야 했다. 진이 빠진 우리는 그들 곁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축 늘어진 호미와 오트를 보며 그들의 마지막이 어떨지 감히 상상해 보았다. 몸을 돌려 연인을 바라봤다.
"나는 호미오트가 동시에 고양이별로 떠났으면 좋겠어." 나는 말했다.
"아니야, 그럼 네가 너무 힘들 거야." 그가 말했다.
"그냥 내가 먼저 죽고 싶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작게 말을 내뱉었다. 상상할 수 없다. 그들은 나의 살붙이고 나의 신이다.
병원을 다녀온 다음날 우리는 호미를 데려다 오래간만에 목욕에 나섰다. 고양이에게 해롭지 않다는 샴푸를 배송받아 그간의 기름때와 생활 때를 말끔히 벗길 작정이었다. 물 온도를 맞추고 털을 충분히 물에 적셨다. 샴푸를 손에 덜어 호미의 털로 거품을 내었다. 내 몸과 마음이 정련되는 기분이 들었다. 물을 싫어하는 호미가 이만큼 감당해 주는 게 기뻐 늘 하던 것처럼 그의 얼굴에 내 얼굴을 맞대었다. 그 순간 호미가 발톱을 세우며 날뛰었다.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밖으로 나간 호미는 털이 젖어 쭈뼛쭈뼛한 채로 집안 가장 안쪽으로 숨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려 따라간 연인에게 처음으로 하악질을 하며 그를 거부했다. 그날 우리는 에어컨도 켜지 못하고 호미의 곁만 맴돌았다. 채 말리지 못한 털 때문에 혹여나 감기가 걸리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호미의 마음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물에 젖은 호미는 흡사 화난 고슴도치 같았는데 처음 보는 날 선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어렵사리 곁을 내준 호미가 돌아서 버릴까 무섭기도 했다.
손에는 병원에서 처방받은 호미와 오트의 5일 치 알약이 쥐어져 있다. 고양이를 키우며 가장 어려운 일은 단연 약 먹이기 일 것이다. 츄르에 섞어도 주고 주사기에 담아 입에 밀어 넣기도 해 봤지만 다 헛수고다. 특히 맛이 쓴 약 때문에 오트는 절대로 약을 먹지 않으려 한다. 어찌나 고집이 센지 한번 아니면 아닌 고양이다. 약인 건 귀신같이 알아채 멀리 도망가곤 한다. 한숨부터 나왔다. 일단 성미가 온순한 호미부터 약을 먹였다. 착하게도 어설픈 나의 손길을 받아줘 약 넘기기에 성공했다. 이제 실전이다. 오트를 안아 들고 그의 머리를 쥐고 입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오트는 이내 내 품을 벗어나고 만다. 다시 한번. 도망. 다시 한번. 다시 도망.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알약을 집어던지고 바닥에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내 울음소리에 오트도 호미도 어리둥절해한다. 짜증이 난 나는 불을 끄고 곧장 침대로 갔다. 그리고 이불을 쥐고 몸을 웅크려 울었다.
"너네가 약을 먹어야 나랑 오랫동안 살 수 있어. 엄마는 너네 잃기 싫어. 엄마가 초보라서 미안해."
이내 오트가 침대 곁으로 와 내 발치에 똬리를 틀고 눕는다. 그 보드랍고 따뜻한 화해의 몸짓에 옹졸하기 짝이 없는 내가 미워 또 엉엉 울었다.
말을 하지 않는 그들과 교류하는 방법은 의외로 여러 가지가 있다. 아플 때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매우 답답하지만, 가끔은 그들과의 소통의 매개체가 언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호미는 기분이 좋을 때 그릉그릉 소리를 내며 가자미 눈을 뜬다. 눈을 얼마나 가늘게 뜨냐가 행복의 척도이다. 반면 동공이 커지고 움직임이 둔해지면 경계하고 있다는 말이다. 엉덩이 쳐주는 걸 세상 가장 큰 칭찬으로 여기는 호미는 다리에 몸을 비비고 바닥에 뒹구르르 배를 뒤집는 것으로 사랑을 말한다. "내가 너를 신뢰한다고.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오트의 사랑 표현은 단 한 가지이다. 발치에 몸을 기대 눕는 것. 그녀와 나는 그 단순한 행동으로 사랑과 위안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나는 매일 아침 그들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잘 잤어? 엄마가 호미오트 많이 사랑해."
고양이가 지구를 지킨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인간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보송보송한 털 결이, 흠 없는 주둥아리의 유려한 곡선이, 연체동물과도 같은 늘어짐 모두 완벽하다. 고양이들은 나를 구원해 주었다.
분기간 이의선
分期間 李宜宣
저는 성묘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삽니다. 함께 산지 벌써 3년이 넘었습니다. 생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분유를 먹이며 키운 오트와 이미 다 커서 서먹하게 저와 만나게 된 호미까지. 그들의 존재만으로 집 안에 온기가 돕니다. 이 글은 작년 여름에 썼던 글입니다. 늘 제게 사랑을 아끼지 않는 호미와 오트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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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소화하기 쉽고 읽기 좋은 글을 정성껏 길러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