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9 [분기간 이의선] #33
출퇴근길, 어느 특정 구간에 들어서면 멀쩡하던 헤드폰의 연결 상태가 매우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듣고 있던 노래가 투둑투둑 기괴하게 끊기기 시작하고 내 귓가를 간지럽게 속삭이던 팟캐스트 진행자의 목소리는 음산하게 토막 나기 시작한다. 또 그놈이 왔구나.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노래하는 가수의 것이든 현학적인 팟캐스트 진행자의 것이든, 두터운 헤드폰 속 배곯은 악귀가 그악스러운 입을 벌려 그들의 혀를 잘게 씹어 삼킨다. 나는 그 악귀가 씹어 삼키는 노래 가사, 진행자의 문장 속 빈자리가 다시 채워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언젠가부터 귓전을 때리는 지하철 레일 소리, 무어라 쉬지 않고 쏟아내는 안내방송 소리, 하루치 피로를 벌써 술로 날려버린 직장인들의 웃음소리를 참을 수 없다. 평안을 지키고자 소음 차단용 헤드폰을 구했는데 이젠 웬 악귀가 나의 소중한 자투리 시간을 방해하고 있다니. 오늘은 아니려나 싶다가도 악귀는 매일 같은 길목에서 찾아온다. 악귀야, 이렇게 내 귓속까지 와주다니 영광이다. 악귀보다 입술에 나는 피 맛을 참을 수 없다.
퇴근과 동시에 아늑한 헤드폰의 세계로 들어와 세상의 소음을 차단시키며 산지 꽤 되었다. 전원을 켜고 소음 차단 기능을 실행하면 다른 세상에 나 혼자 뚝 떨어진 기분이 든다. 처음 사용해 본 소음 차단 기능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간 무작위적으로 들리는 소리들에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는데 신기하게도 헤드폰만 끼면 모든 소리가 일순간 사그러든다! 혁명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에 직장 상사 욕지기를 해대는 사람들의 살기가 싫어 잠자코 음악 볼륨을 높였다. '너의 살기에도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무적의 헤드폰이 그 욕지기에서 나를 구원할 테니.' 폭포처럼 지하철역으로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속 내가 있다.
'이 속에서 깔려 죽는다 해도 9시 뉴스에는 나오지 못하겠지. 아니, 잘하면 한 문장 정도 할애해 줄지도. <20대 직장인 이 모 씨, 퇴근길 인파에 깔려 사망, 출퇴근길 교통 혼잡 개선 시급해...> 그마저도 제도의 문제점을 꼬집는 문장이 될 거야.'
이렇게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세상 모든 우리들을 존경한다. 우리는 흔들리는 지하철 속 휴대전화 작은 모니터에 기대어 하루를 보낸다. 또 다른 하루를 주신 감사 기도 따윈 잃어버린 채. 어차피 매일 똑같은 날들이니까. 감사한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소리에 노출되어 사는 게 아닐까. 서울에 사는 사람들 중 완벽한 고요 속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잠에 들려 머리를 뉘면 창문 밖에서 너무 많은 소리들이 건너온다. 쓰레기 수거차량의 경고음, 오토바이의 퉁퉁한 배기음, 취객의 고성방가. 원치 않는 소리가 예고도 없이 튀어나와 잠에 들락말락 하는 나를 깨운다. 차라리 소음 차단이 내 귀에 탑재되어 있는 기능이었다면 좋았겠다. 잠에 드는 그 순간까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선택적으로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평안할지 상상하다 잠에 드는 순간이 많았다.
헤드폰을 쓰면 소음은 물론 보고 싶지 않은 광경들 또한 모른척할 수 있는 배짱이 생긴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줌마들의 하루도 말이다. 챙이 커다란 모자를 쓰고 땀이 나지 않는 손바닥을 면장갑으로 싸맨 그들이 인파를 가로막는다. 역에서 나오는 사람들 손에 억척스레 전단지를 쥐여주는 그들의 하루를 나는 모른 체한다. 헤드폰이 없었다면 다사스러운 그들의 하루를 무시하지 못하고 곧바로 쓰레기통에 처박힐 전단지를 손에 쥘 수밖에 없을 텐데. 헤드폰 하나로 나는 좀 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삶을 살고 있다. 못된 삶을 산다.
멀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 몸을 싣고 마침 내 앞에 난 자리에 무거운 엉덩이를 얹었다. 사람이 아무리 많대도 헤드폰 속 고요에 갇힌 나는 혼자다. 몇 정거장이 지나자 내 앞에는 어디에 다녀오시는지 알록달록 예쁘게 꾸미신 할머니 세 분이 서셨다. 내 옆자리가 비워지자 한 분이 엉덩이를 붙이셨고 이내 나를 흘긋 훔쳐보셨다. 헤드폰도 썼겠다, 나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이 든 사람들 곁에 있을 때는 청각 차단이 가장 쉬운 방법이겠구나. 그러다 나 자신 쪽으로 반문했다.
언제부터 소리가 소음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을까.
나는 언제부터 마음이 좁아지게 되었을까.
마음이 자꾸만 좁아진다. 좁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처럼 불행한 것이 없다. 점점 옥죄인 마음은 이제 손바닥 한 뼘으로 쥐어질 만큼 작아져 버렸다. 나의 작아진 마음은 사람들의 행복한 한때를 보기 거북해하며 친구의 다정한 안부 인사조차 가식이다 말했다. 마음이 결국 한 뼘이 되었을 때 나는 모든 소셜미디어 계정을 비활성화했다. '인생의 어느 지점부터 어느 지점까지 리셋할 수 있다면.' 헤드폰이 만들어낸 고요 속에 갇힌 나는 인생의 리셋 버튼만을 바랐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 헤드폰에 악귀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악귀는 횡단보도 앞에서, 지하철 플랫폼에서, 김가네 김밥 집 앞에서 출몰했다. 처음에는 즐겨듣는 팟캐스트 진행자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투둑투둑 끊기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도 또 같은 지점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노랫소리가 조각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것이 악귀라는 생각이 든 것은 며칠 전의 일이다. 팟캐스트 진행자의 조곤조곤한 말씨가 공격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하고 한 소리만 반복했다.
악, 악, 악, 악. 악.
순간 소름이 끼쳐 헤드폰을 벗었다. 그 위치가 횡단보도 앞, 이리저리 손을 뻗치며 전단지를 들려주는 아줌마의 앞이었다. 휴대전화에 떠 있는 팟캐스트 앱을 종료하고 헤드폰을 손에 든 채로 전단지를 받아왔다. 세상은 여느 때처럼 자잘한 일상 소음들을 내고 있었다. 산책 가는 강아지의 기분 좋은 짖음, 엄마를 부르며 달려가는 꼬마의 높은 목소리, 과일장수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주술 같은 확성기 소리가 주변을 에워쌌다.
나는 무엇이 악일까 생각했다. 일상의 소음? 억척스러운 전단지 배포? 눈과 귀를 멀게 하는 헤드폰? 소파에 몸을 기대고 요즘의 나를 떠올렸다. 헤드폰으로 꽁꽁 닫은 내 귀엔 아무것도 들리는 게 없고 산과 들에 널린 꽃조차 눈에 담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우울한데. 인생의 어느 지점부터 어느 지점까지 리셋할 수 있다면 듣는 귀 따위 가져가도 상관없다고, 차라리 듣지 못하는 쪽이 담백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작은 돗자리 위에 눕자니 퍽 좁았다. 다리는 돗자리 밖 잔디 위로 뻗쳐지고 구깃구깃 앉은 엉덩이는 생각보다 커 우리의 덩치를 타고 개미가 기어올랐다. 어둑해진 해질녘 푸른빛에 기대 책을 폈다. 제목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휴대전화 플래시 라이트를 켜 책장을 비췄다. 그 빛이 그대로 내 눈까지 닿아 눈이 시렸다. 윽. 그는 미안하다며 플래시 라이트를 끄고 휴대전화 가느다란 빛에 의지해 시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귓가에 그가 작은 목소리로 시를 새겨 넣었다.
둔치의 곳곳에서 낮에 터뜨리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술 한잔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는 어린 청춘들의 소리가 멀찍이 들려왔다. 자전거 체인이 감기는 소리, 돗자리를 터는 소리, 힘차게 달려가는 누군가의 발소리. 그 소리들 위에 그의 목소리가 포개어졌다. 시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눈을 감고 가만히 귀만 내어놨다.
"고요 대신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
점점 낮게 깔리는 어둠 속 사방의 형체가 흐릿해질 무렵 내 귓가에 시를 읽어주는 그 목소리만 뚜렷이 인식되었다. 악귀가 헤드폰에 든 것이 이것 때문일까. 세상에는 아직 많은 소리가 남아있다고 일러주기 위해서였을까. 인생의 어느 지점부터 어느 지점까지 리셋하면 지금 네가 무르팍에 기대어 듣는 시 한 편도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느냐는 말이었던 걸까.
* 박준 시인의 <숲>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봄이 막 시작될 때 바쁘게 편지를 보내고 저는 수렁에 깊게 빠져있다 가까스로 구출되었습니다.
다들 무탈하시죠?
오늘 글에 나왔듯, 저는 그간 세상의 모든 소리를 소음으로 여기며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지냈습니다.
왜 그렇게 우울했냐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인생에 그런 지점들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들에서 해방되고 싶을 때 말이에요.
그런 날들을 보내다 연인과 한강 둔치에 포개 누워 서로의 귓가에 시를 읽어주게 되었습니다.
자잘한 일상의 소음들 위에 더해진 연인의 목소리와 그 시는
근래 들은 모든 소리 중에 단연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동안 [분기간 이의선]을 접을까 수백 번 고민했지만
어떻게 사랑 편지를 보내놓고 잠수를 타는 연인이 있겠나 싶어 또 용기를 내어 찾아왔어요.
매우 차분한 글이라 호불호가 있겠지만은,
그동안 저를 집어먹던 우울이 내놓은 형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 글을 보냅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더없이 좋은 날들만 보내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분기간 이의선]이 저에게는 너무 소중해 끝내지도, 다른 글로 이어 나가지도 못할 것 같았지만
어찌어찌 또 하나의 글을 보냈다는데에 제 자신에게 기특하다 말해줄 겁니다.
또 성실히 글 한 편을 지어오겠습니다.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의선 드림
[분기간 이의선]이란?
생명과학 분야 연구원으로 일하는 글쓴이 '이의선'의 메일링 연재글 입니다.
직업은 연구직이지만, 직업과 전혀 무관한 글을 씁니다.
일상의 작은 감정들을 내밀하고 진솔하게 말합니다.
어떤 마음은 잘 모아뒀다가 내 이야기가 아닌 척 소설로 끼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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