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을 하고 난 후 가족들이 가장 난감해하는 것 중 하나는 외식이었다. 엄마 때문에 식당에 가는 게 부담스럽다던 아이들, 꼭 이렇게 불편하게 살아야 하냐고 불평하던 남편도 이내 적응을 해서
"비빔밥에 달걀과 고기는 빼고 주세요."라고 주문을 한다. 한국 식당에 가지 않는 날에는 샐러드 정도가 나의 주메뉴가 되었다.
또 다른 상황은 초대받은 식사자리이다. 외국 살이는 한인들의 작은 공동체 생활인지라 유난히 서로 초대하는 일이 잦다. 메뉴는 100% 고기 만찬. 삼겹살, 족발, 보쌈 아니면 닭고기... 채식을 한다고 하면 발생할지도 모르는 애매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밥을 야채에 싸 한입 한입 크게 먹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을 내놓은 것에 신경을 쓰지 그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먹는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먹는 모습을 애타게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의 엄마들 뿐이다. (물론 나도 그 엄마들 중 하나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고 평화로웠던 나의 채식 항해는 귀국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이들 학교 문제로 남편보다 먼저 귀국한 나는 코로나 격리를 하는 2주 안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모든 것을 처분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상황에서 아이들 학교 보내기 위한 서류 작업, 격리 후 최대한 빨리 시행해야 하는 집 리모델링, 가구, 가전뿐 아니라 젓가락 하나까지 다시 구입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요가와 명상, 자연식물식을 하던 나의 일상은 먼 옛일이 되고야 말았다. 텅 빈 집에서 캠핑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이 모든 일들을 준비해 나갔다. 매일 배달앱에서 결제 메시지가 왔다. 커피와 샐러드 아니면 샌드위치, 그리고 엄마의 김치와 밥. 프리다 (세부에서 같이 지내던 도우미 이모님)가 애타게 그리운 나날들이었다.
격리 해제 일주일 후 아이들은 등교를 했다. 리모델링 일정을 아무리 빨리 당겨도 2주는 동생집에 얹혀살아야 했다. 급한 대로 80만 원짜리 중고차를 사서 아이들을 등교시키던 첫날, 첫째는 차 안에서 복통을 일으켰고, 덩달아 둘째도 토할 것 같다며 아우성이었다. 우리는 등교 후 일주일 동안 학교가 아닌 학교 근처 언니 집으로 가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서야 학교 교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모두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사이 나의 출근일도 다가왔다. 9월에 딱 맞춰 출근하기로 했지만 모든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귀국 한 달 뒤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3년의 공백은 막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나를 제압했고, 슬라이드 한 장 한 장 볼 때마다 나의 눈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리고 며칠 후 현미경을 보고 있던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극도의 불안감과 과호흡, 사지마비가 발생하는 사이 나는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런 이벤트는 또 나를 괴롭혔다. 병원에서 공황장애인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내가? 내가? 내가?
깡말라버린 몸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장착하고 채식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밥과 김치만으로 굶주린 배만 채워나가던 그때서야 다시 나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정신적으로 평온한 사람라고 자부했다.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돌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위하며 살았는데 지치고 웃음이 없는 날카로운 내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와 그것을 극복하려는 싸움에서 내가 진 걸까? 스트레스에 지배를 당했단 말인가? 아니면 극단적인 억지 채식이 날 망가뜨린 걸까? 세로토닌 부족인가? 필수 아미노산 공급이 끊겨 세로토닌이 생성되지 못한 걸까? 세부에 있을 때처럼 햇빛에 노출되지 않아서 일까? 내 머릿속에는 온갖 시나리오가 그려지고 있었다. 아무튼 나의 불량 채식은 스트레스와 함께 가장 먼저 범인으로 지목받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마음속에 항상 비건 지향적 삶을 살아보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편해야,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비건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