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네 번의 이사
나의 고향은 작은 산을 뒤로한 세 동짜리 작은 아파트입니다.
1980년 초, 어느 봄날, 서울의 작은 병원, 담당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오후, 어머니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저를 낳으셨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의 사슴도 아니고 인간이 스스로 자식을 출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아마도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렇게 건강하게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겠죠.
유아기를 보낸 세 살까지, 서울시 외각의 언덕이 가파른 동네에 살았다고 부모님께 들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밝혀지듯 기억의 스위치가 켜질 무렵, 저는 마치 신생아기를 건너뛰고 처음부터 네 살 꼬마였던 듯, 작은 산을 뒤로한 세 동짜리 작은 아파트, 봄날의 이름 모를 분홍색 꽃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제가 인식한 첫 번째 세상이 제 눈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안양'이라는 도시와 저의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자란 동네는 서울의 경계 선 즘 자리 잡고 있었지만, 저는 마치 시골 소년처럼 주말이면 산에 올라 가재를 잡았고 친구들과 꽃을 따서 먹었고 장미꽃 가시를 콧등에 붙이고 코뿔소 흉내를 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단히 부유하지는 않았더라도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기에 저의 유년기는 행복으로 가득했습니다.
안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꿈을 안고 중국을 향했습니다.
어린 시절 안양이라는 도시가 꽤나 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중국에 도착하니 버스나 기차, 혹은 비행기를 타더라도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이 참 넓다'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더군요. 이십 대를 중국에서 보내고 나니 저의 고향이 중국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이었는지 가물가물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양과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혼 후, 안양에 있는 작은 중소기업에서 십 년을 재직했습니다.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입사한 회사에서 십 년이나 재직할 줄 몰랐습니다. 또, 다 큰 어른이 회사 일로 방황하며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퇴근하는 일이 그렇게 잦을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저의 대부분의 젊음 시절을 함께한 회사는 십 년 동안 저와 같이 성장하였습니다. 100억대의 연매출은 800억까지 성장했고 직원은 300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입사 후 3년 동안 영업과 물류를 병행하며 바닥을 박박 기었고, 5년 동안은 출장으로 한국보다 중국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저의 역량은 일취월장했고 입사 8년 차에는 삼십 대에 비로소 전략기획팀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 해, 저는 회사가 있는 안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자란 도시에서, 비록 작은 회사지만 전략기획팀장이 되었고,
그렇기에 안정적으로 아이를 키우며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처음으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고, 운명이 쥐락펴락할만한 것이었다면, '눈물 젖은 빵'이나 '고난의 행군'이라는 단어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회사의 주인이 바뀐 후 뉴스에 대서특필 되길 여러 번, 저는 잠에서 깨어나 출근을 네 시간 앞두고, 불이 꺼진 어두운 거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쓴 소주를 연거푸 마시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내가 잘 못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 됐고, 회사에 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잘해온 것은 딱히 없지만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 있다면,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악착같다는 주위의 수군거림이나 악바리라는 별명이 듣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특별히 손에 가진 것이 없다면 남는 것은 '세상을 이겨내고자 하는 악'밖에 없으니까요.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었나요, 살다 보면 가끔씩은 실타래처럼 모든 것이 엉켜있다가도 기적 같은 선물이 주어지곤 합니다. 불안함과 두려움에 1년을 보냈을 무렵, 드디어 제가 원하는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 년 전 눈물을 머금고 쓰디쓴 소주를 마셨던 거실 구석 위에 당당히 서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안양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창피했던 순간들, 부모님한테 달려가서 큰 소리로 자랑하고 싶을 만큼 벅차올랐던 성취들,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어느 겨울날 청계산에서 내 손으로 친구를 묻어주었던 그날의 깊은 슬픔, 한국에 방문한 중국 고객들을 접대하며 지하실 어딘가에서 느껴졌던 습하고 시큼한 냄새와 마음속의 비루 함들, 그 모든 것을 이겨냈다고 생각하고 안양 새 집으로 이사한 후, 아내와 아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았던 날, 그리고 굳은 결심으로 더 나은 삶을 향해 안양을 떠나기로 했던 그 순간까지...
안양의 마지막, 이 집에서 우리 가족은 많은 것에 도전했고, 실패했으며 또한 성취하였습니다.
아내는 동시 통역사가 되어 일본 가장 큰 기업의 CEO 통역을 맡아서 진행했고, 다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지금은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흑인 선생님이 무섭다며 교실 뒷자리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불안함을 이겨내고 영어 유치원도, 태권도 1품도, 수영 등등 많은 성취와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저는 그래서 안양이라는 도시가 참 고맙습니다.
우리 가족은 비록 안양에서 큰돈을 벌지도 못했고, 예상치 못한 행운으로 복에 겹다는 생각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아주 바쁘게 살았고 그 시간을 버텨냈습니다. 그렇기에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행복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감사한 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든 도시를 떠나지만 언제나 그랬듯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곳, 우리 가족이 함께하는 그곳이 바로 나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띵동, 띵동!"
과거를 뒤로하고 미래를 향해야 한다며 벨 소리가 크게 울립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저의 알 수 없는 미래에 한 줌의 용기를 더해보려고 합니다.
여러 분에게도 오늘이 행복한 날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