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캠벨 저 이윤기 번역 고려원
이 책은 이미 두 번을 읽었지만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 이유는 <코스모스>를 읽은 후, 이 광대한 우주 속의 나와 나의 삶을 어찌 정립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생기면서이다. 두 번을 읽으면서 막연하나마 찾을 수 있었던 희망이랄까? 인간과 인간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읽어도 쉽지 않았다. 깔려 있는 배경지식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신화는 온통 은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해 내는 그의 말을 따라가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꼼꼼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대략의 의미, 중요한 메시지는 알 것 같다.
우주에는 이 세상으로 끊임없이 생명을 내어 보내는 에너지의 근원이 있는데, 신을 에너지 자체를 보는지, 신을 에너지를 실어 나르는 수레를 보는지 등의 차이는 있긴 하지만, 각 지역, 각 시대의 신화는 자기 삶의 중심을 우주의 중심과 일치시키려는 메시지를 은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너 자신에게 묶여 있는 자아를 잘라 자유롭게 하려고 칼을 가지고 왔다’라고 했는데, 자아를 절개하지 않으면 그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에너지는 지기이고, 지기를 내 몸에 모심을 잊지 않는 시천주의 삶을 설파했던 수운선생의 생각과 그대로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는 구절은 참으로 깊은 울림이 있다. 이로서 내가 기도하고 수련해야 할 이유는 더 명확해졌다. 다만 나의 게으름과 정신 팔림이 문제인 것이다. 밑줄 친 구절을 옮겨본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35p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39p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을 희생합니다. 그러나 결혼의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道>를 나타내는 중국 이미지를 보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서로 꼬리를 물고 상호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음양의 관계, 남성원리와 여성원리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결혼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은 결혼한다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이랍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고 하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고 하는 제물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되는 것이랍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94p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107p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는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인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112p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만치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23p 내면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이,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131p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고 하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건 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138p 본질적 성질상 인생은 죽이고 먹임을 통해서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은 원래 이런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140p 영웅의 행동반경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선악이 있는 시간의 장, 대극이 있는 곳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초월의 장을 나서면 대극의 장으로 들기 마련입니다.
143p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이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입니다.
3. 태초의 이야기꾼들
174p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81p 수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구체(球體)라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 씨가 앉아 있는 그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있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모이어스 : 그게 곧 메타포, 현실의 이미지라는 것이군요.
캠벨 : 그럼요.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를 마주 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4. 희생과 천복
187p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200p 모이어스 : 지리학은 우리의 문화와 종교 관념의 모양을 빚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막의 신은 초원의 신이 아닙니다.
캠벨 : 단수로서의 우림(雨林)의 신도, 복수로서의 우림의 신이 아니지요. 사막으로 나오면 하늘도 하나요, 세상도 하납니다. 그러니 신이 하나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정글에는 지평선이 있기는커녕 10야드 앞을 보기도 어렵습니다. 유일신 관념이 생길 리 없지요.
모이어스 : 어떤 종족의 지리학이 신의 이미지를 빚는다....
캠벨 :신 관념은 항상 문화적 조건을 따릅니다. 선교사가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 자기의 신을 들여와도 신은 그 땅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신으로 변모합니다.
203p 식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은 영속하는 내부적인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숲과 농경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212p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대극,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자아> 위주의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보다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善) 이어어야 한다는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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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는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을 우리 의식과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삶에서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는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을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입니다.
225p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234p 천국은 바로 이곳에서 경험해야 하는 것이지, 하느님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에요.
5. 영웅의 모험
237p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242p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253p 초월적인 에너지의 원천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에너지는 만물이 에너지의 존재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279p 영적으로 우리를 지탱하는 것을 위하여 육체적 욕망과 공포를 희생시키는 일... 바로 이거 아닙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에서, 육체가 우리의 깊디깊은 삶의 정체를 깨달아 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본 적 있습니까?
282p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286p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87p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304p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307p 부처가 말한 니르바나는 바로 이런 종류의 평화의 중심점입니다. 불교는 대단히 심리적인 종교이지요. 불교는 바로 고통이라고 하는 심리적인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인생은 슬픈 것이라고 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슬픔으로부터의 탈출구가 있는데 이게 바로 니르바나입니다. 니르바나는 우리 마음 혹은 의식의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천당처럼 어떤 <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니르바나는 인생이라는 소용돌이 바로 그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니르바나 상태는 욕망이나 공포나 사회적인 인연에 쫓기면서 살지 않게 될 때, 자기 안에서 내적인 평화의 중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으로부터 나온 자발적인 행위, 이것이 바로 보살의 길, 말하자면 이 세상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삶인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에 붙잡힌 상태에서 벗어납니다. 욕망, 공포, 의무 같은, 우리를 붙잡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을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311p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정말 신화를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을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의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 만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요.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 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영웅의 모험, 즉 살아있음의 모험이지요.
6. 조화여신의 은혜
319p 우리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 몸, 우리 육체의 형상과 이 만물을 짓는 에너지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아내어야 하는 겁니다. 에너지가 없는 몸은 살아있을 수가 없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몸에서 나오는 삶이고, 무엇이 에너지와 의식에서 나오는 삶인가를 느끼고 있지 않아요?
344p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54p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373p 청교도들은 결혼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결혼하면 날마다 사랑해야 하고 날마다 용서해야 하니까요. 말하자면 사랑과 용서의, 현재진행형 聖事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374p 여기에는 <내>가 있고, 여기에는 <그>가 있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가령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결혼은 두 사람의 삶이 아니지요.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375p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376p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異性의 측면과의 만남이랍니다.
381p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8. 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384p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방식은 원시적인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신들을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의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391p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원수의 눈에 들어있는 티끌을 뽑아내려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의 삶의 방법을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400p 자기 삶의 중심을 우주의 중심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이군요.
401p 이 세상으로 끊임없이 생명을 내어 보내는 곳, 이곳이 바로 무궁무진한 에너지의 근원인 겁니다.
402p 엘리엇은 변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고요한 중심에서는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함께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이 고요한 중심은 시간의 흐름과 영원의 흐르지 않음이 공존하는 바퀴의 굴대에 해당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성배가 상징하고 있는 무궁무진한 중심인 겁니다. 우리 삶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 보세요.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 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괴테는 神性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 유효하지 않다,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한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411p -예수는, 자기는 이 세상에 칼을 가지고 왔노라고 합니다만, 저는 그가 우리를 치기 위해 칼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의 칼을, 자아를 절개하는 칼로 이해하는데요, 그러니까 예수는 ‘너 자신에게 묶여 있는 자아를 잘라 자유롭게 하려고 칼을 가지고 왔다’ 이런 뜻으로 말한 것 같은데요?
-산스크리트 어로는 이것을 <비베카>라고 합니다. 즉, <분별>이라는 뜻이지요. 머리 위로 불칼을 높이 치켜든 부처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자, 이게 어디에 쓰이는 칼일까요? 이게 바로 분별의 칼입니다.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것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흐르는 시간이 영원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간의 장에 삽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의 장에 비치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영원의 원리입니다.
-영원의 경험이라는 말씀인가요?
-우리의 본질에 대한 경험이지요.
-영원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까?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지요. 아니, 없는 데가 없다고 해도 마차가지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영속하는 곳일 뿐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흔히들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 가고 하는 것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불교에는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이 개념은 시간이 있는 데엔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모습입니다.
420p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어요......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왜?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423p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