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엔 늦추위로 가까스로 피었다가 비 맞아 다 떨어졌었다. 올해는 비 한 번 안 오니 조석으로 감상하는 나날이다. 창밖으로 만발한 벚꽃이 우중충한 우리 형편에 등(燈)을 밝혀주는 느낌이라서 복인지 행운인지 으쓱해보기도 했다. 낮다 싶었는데 벚나무 우듬지와 눈높이가 엇비슷한 3층집을 산 게 선견지명이고 내 선택의 보상을 받는 것 같아 뿌듯한 것이다. 팔아야 할 때는 벚꽃 만발하는 4월에 내놓으면 싸게 산 집에 웃돈 받을 거라는 중개인의 덕담이 떠올랐다. 그이는 은퇴 후에 꽃집 차리면 성공하시리라.
꽃 지면 버찌가 가득하겠다. 씨에 무엇이 들었는지 쪼개 봐도 별 것 없지만 물주고 기다리면 제 스스로 알려주는 게 이치다. 나를 파고들어보면 파란만장 핑계들이나 그득할 것이다. 생의 거짓말을 진실인양 고백하면서 그것들을 도금하는 방식을 익혔을 뿐이다. 지난 상처들을 엊그제인양 엄살떨며 당장의 공감을 구하는 법도 깨우쳤다. 시제를 감추는 꼼바리 짓이었다. 꽃은 사람을 부르는 게 아니라 다만 피어있음으로 찾아오게 한다. 누구에게 봐 달라고 피는 건 아닌데 나부댔던 적이 많았다.
바람만 불면 꽃잎이 휘날리니 등(燈)을 잃는 슬픔을 나날의 할부로 갚는 것만 같다. 작년을 빗대어 차라리 하룻밤 폭우에 져버리면 편하겠다고 복에 겨운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바람은 내 마음을 아는지 꽃잎을 한 쪽으로 치우느라 바쁘다. 벚나무 가지들은 숭어리들을 잃어 수척해지고 박새도 직박구리도 고요한 오후다. 작년 봄을 표현해주는 재연배우처럼 하릴없이 서 있다가 창틀의 먼지를 닦았다. 꽃보다 먼지라니 현실은 잔인하게 현실적이다.
슬픔의 지속시간과 총량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며 또 슬픔의 속도도 가늠해보았다. 상대의 마음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는 동안의 서늘함과 더는 가슴이 뛰지 않는다는 고백에 무너진 사랑 까지 그려보았다. 한 달 지나고도 선연(鮮然)하다면 기억일까. 한 달 내내 사늘한 것은 여운(餘韻)이라 하련다. 여운은 심장에 스미는 색깔, 기억은 뇌리에 새겨지는 무늬일 것 같다. 종일 손가락에 있던 반지를 빼놓고 보면 그 동그라미에서 무언가가 느껴진다. 창밖에 눈을 둔 채로 젖은 우산이 마르는 시간, 커피가 식는 속도, 구겨진 셔츠가 펴지는 동안 같은 느낌들을 비다듬었다. 삶의 우여곡절은 내 생각과 다른 순서로 일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인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