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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관 Mar 08. 2024

청소

                                                                        

햇살 들이쳐서 눈부시고 추운 발코니에 세워뒀는데 스위치 올리자마자 맹렬히 돌아간다. 기계는 미련하다 싶게 충직하다. 인간관계에 이렇게 임한다면 쉬운 사람이라고 무시당할 것 같다. "좋은 사람 되려다가 쉬운 사람 된다"는 다산의 말씀도 생각난다.     

갑갑한 걸 못 참아서 커튼도 안 하고 생활복 고무줄마저 느슨하게 조절하는 성격이다. 빨아들여서 청소기에 가두면 오죽하겠나 싶어서 창문 열어놓는다. 청소기 뒷바람으로 먼지들을 깨워서 내보내는 것이다. 나가서 골목을 어슬렁거리거나 학교 운동장으로 가봤자 인조잔디라서 실망하겠지. 먼지가 흔했던 시절이 그립기도하다. 농구하던 고교 흙바닥 농구장이 아련하고 백묵가루마저 추억이 되었다.     

먼지는 식구들이 흘린 부스러기거나 머리카락일 테다. 청소를 적당히 해내려면 거실로 햇살이 안 들어오는 늦은 오후가 좋다. 먼지가 안 보여서 말끔히 해냈다는 뿌듯함(?)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으른 자들은 잔머리만 부지런하다. 진공청소기로 밀면 부유하는 먼지들이 끝낸 한참 뒤에도 보인다. 문 닫고 청소하니 고이 잠든 것들을 깨워 방을 채우는 꼴이다. 불꽃놀이 후의 화약 냄새처럼 맵지는 않고 텁텁하게 목을 누른다. 법당은 좋은데 부처가 없으면 소용없다. 우리 집은 허술하지만 가족사랑이란 부처를 모시고 살았다. 청소는 유발상좌(有髮上佐)인듯이 엎드려 방마다 빗자루로 염불하는 일이다. 누구나 더러워진 집을 수시로 쓸고 닦고 얼굴은 아침저녁으로 씻는다. 마음은 청소하지 않았다. 어려운 일이지만 미술작품, 책, 산보가 마음 청소기 아닐까 한다.     

부모로서의 책임을 빨리 덜어내고 싶기에 녀석들이 얼른 자라기를 바랐다. 그 책임감을 벗어내고픈 마음이 그리 컸었나 해서 자책하곤 했다. 방 크기가 사랑의 넓이와 깊이 아닌가 생각해보며 청소기를 밀었다. 흡입구가 안 들어가는 곳은 여전히 안 들어갔다.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해보는 마음으로 여태 살아왔을까. 불가능을 아는 건 지혜일 테고 다시 또 해보는 건 열정이다. 지혜는 무기력으로 변질되고 열정은 미련하다는 조롱을 받기도 한다. 돌이켜보니 지혜와 열정의 돌연변이로 살았다.     

장남 방은 퇴원하고 요양하던 나날들이 떠올라 먹먹해진다. 그 날들을 어찌 견뎠는지 지금도 떠오를 때마다 울대가 막힌다. 실컷 울어버릴 기회를 찾기도 했다. 신을 믿는 사람의 기도와 무신론자의 기도는 다를 것이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엔 신이 있을까. 어머니 방을 물려받았으니 고요히 누워계시던 모습도 겹친다. 독립한 막내 방은 낡은 책꽂이들만 우두커니 서 있다. 결혼하고 첫 집에 들어갈 때 장만한 것들이다. 연속극처럼 들리겠지만 난생처음 책꽂이라는 걸 장만해놓고 밤늦도록 싱글벙글 비다듬었다. 내 방이란 것도 처음 생겼다. 퇴근해서 저녁 먹자마자 들어가서 밤늦도록 책을 뒤적거렸다. 아내가 외롭고 서운할 것 같아서 식탁에서 책을 보았다. 식탁에서 시집 3권, 산문집 등등 대다수를 펴냈으니 반찬냄새 날 것 같다. 진공청소기로도 안 되고 물걸레도 소용없을 것이다. 일거에 소멸시키는 일이 있지만 슬퍼서 말 못한다. 인간들은 때 되면 환생이라는 중음(中陰)의 먼지통에 들어가니 신은 청소기가 없겠다.     

 ** 유발상좌(有髮上佐) : 승려의 삭발은 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기른 채 은사 스님을 따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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