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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관 Mar 08. 2024

정조준


밤이 못 읽겠는 번역시집처럼 두꺼워진다. 한 페이지씩 어두워진다. 끔찍한 사고를 당한 지인 문병을 다녀왔다. 언제든 그런 당사자가 될 거라는 두려움보다 들이닥치는 운명이 허망해서 무기력에 빠졌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데 “우린 함께”라는 곁부축도 못했다. “나도 이렇다”는 슬픔을 나눠도 서로 쓰라린 일 일뿐이다. 설사 이런 감정들을 그이가 받을 수 있더라도 위안은 안 될 것이다. 그만하니 다행이라는 상투어는 하지 않았다. 끔찍해서 눈도 맞출 수 없었다. 인간존재의 간극은 참혹, 기쁨, 슬픔 같은 것들이 들이닥쳤을 때, 실감하게 된다. 존재들 사이에 건너지 못할 살얼음 어린 강이 있는 것이다. 타인의 참혹에 함께할 수 없음을 느끼면서 고립감으로 번졌다.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 피하지 못한다는 열패감 같은 회오리들이 뇌리를 후려친다. 진력하여 살아내지만 이런 참혹 앞에선 노력도 허망하다. 인생이 무너진 사람 앞에 운명타령이나 하는 꼴은 아니다.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     

산책길 까마귀에게 사과하고 싶다. 음산함의 이미지가 씌워졌는데 들을 때마다 명랑하다. 그악스런 까치 울음보다 듣기가 말랑하다. 근래의 심리가 한 칸 올라간 탓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인간평균보다 낮다고 느낀다. 까마귀는 두드리는 분위기, 까치는 찢는 느낌이다. 이러며 오후를 복기(復棋)하는 동안 밤이 왔다. 까마귀는 누명을 언제나 벗으려나. 하늘의 그가 쏜 화살이 빗나가 내 심장을 관통해서 벗어날 수도 없는 통증에 시달려야 할 지, 다음엔 나를 정조준해서 치명상을 입힐지 모를 일이다. 사고와 상관도 없는 까마귀 까치를 곱씹으며 저녁의 갈피를 다 넘겼다. 새 같은 상관물을 찾는 심리가 불안감을 동조해달라는 구조신호인지도 모르겠다.      

진행하던 일이 어긋나버린 탓도 있다. 공들여 만든 유리잔이 박살나버렸다. 울컥하는 마음에 주워 담아봐야 손만 베였다. 되돌릴 수 없으니 무뎌지는 게 상수다. 내게 덧씌워진 것들이 누명이었으면 벗겨 달라 기도할 테고 작정하고 씌운 거라면 담담해지는 연습이라도 해보련다. 자해(自害)는 약한 것들의 호신술이고 포기는 자존심이나마 챙긴 패배다. 마음은 연습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해야 두려움을 덜 수 있었다.     

신이나 천사 같이 침묵의 상징들에게 투정부리는 습성을 줄이고 싶다. 참담한 상황을 오래도록 견딘 탓이다. 방법 없으니 견디고 견딜 뿐이다. 대꾸 없이 바라만 보는 이들에게 시비를 건 셈이니 겁이 없는 건지, 문장이 불체포특권의 영역이라도 되는지 거듭 생각해봐도 아둔함의 극치다. 지인의 사고가 맴돌아 소름끼친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데 함께 우는 것 말고 방법도 없다. 한 조각 털어놓으면 끔찍한 기분이 희석될까 해서 끄적거린다.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럽다. 덜어내서 도울 수 있다면 무엇이건 내놓고 싶다. 천안역에서 바라보던 눈발이 지금도 운명의 상징인양 시리다. 내 심장에 내리는 듯 시리다.     

 **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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