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라면 새소리에 은행이 둥글어지고 비와 햇살에 성장했을 텐데 산지에 자생하는 건 없단다. 악취 때문에 이파리 관상용으로 공원 모퉁이에나 심겨진다. 유전자 감별에 따라서 농가에는 은행 채집이 가능한 암나무를, 거리에는 악취가 풍기지 않는 수나무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거리엔 수나무들만 즐비한 셈이니 군대 징집됐다고 해도 되겠다. 조경업자의 실수 인지 몇몇 암나무에 은행이 맺혀있다. 수컷들 사이에 선 여인(?)은 꽃가루 날리며 들이대는 수컷들에게 부대꼈을 것이다.
지식(知識)은 가식(假飾)으로 오인될 수 있으니 동네 은행나무를 취재하련다. 중복인데 은행이라니 성급하지만 벤치에 앉을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까닭이다. 숱한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다. 하굣길 남녀 고교생들의 싱그러움을 흉내 냈는지 초록으로 동글고 매끈하다. 늙으면 돌아봄이 잦다더니 옛 인연을 험담하느라 갈갈거리는 할머니들을 닮아서 은행이 겉늙었다. 벌써 노란 기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늙었다’는 말에는 시간, 당연함 같은 것들이 내포되어있는데 겉늙었다는 말이 더 슬프다. 누구나 그럴 수 있겠지만 거기엔 감출 수 없음, 참담함 류의 생애사가 느껴진다. 포장도로라서 빗물도 스며들지 못하고 건물 그림자에 햇살도 모자라는 거리의 은행나무는 사람들 이야기와 시선으로 영그는 것일 테다. 제가 생각한 방향과 다르게 커가는 건 아닐까 싶다. 인간이라면 “그래서 이렇다”고 할 거다.
스미어 이루어진 것들, 외양으로 닮아 비슷해지는 것들, 곰곰 자신을 들여다보는 동안 시나브로 만들어진 것들을 생각했다. ―풍경을 제시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선경후정(先景後情)은 아니다. 전통적 방식이라지만 전통(傳統)만을 고집하다간 불통(不通)으로 변질된다. 희박하겠지만 내 시집 몇 권을 읽은 분은 이런 방식이 별로 없음을 아실 것이다. 표현은 해도 대상의 이미지를 극복해보려고 노력했더랬다. 내 안에 스민 것들은 무엇일까. 숱한 타자들의 언어와 행태를 질투하느라 스미어 자리 잡는 것도 몰랐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다중인격의 환자다. 외양이 (잘 생겼다는)외모라면 이렇게 겸손한 얼굴을 물려받았으니 극구 부정하겠다. 나를 들여다보는 동안 만들어진 것들은 괴물일 테고 가치관과 심미안들의 이종교배를 통한 분열자아 아닐까 싶다. 또 다른 내가 나를 비하한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햇살과 비로 영그는 거라 하더라도 은행은 가을이면 떠오르는 사람, 아름다웠던 장소, 잊지 못할 이야기 같은 것들로 일매지는 거 아닐까. 은행나무가 지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하나하나 사연들을 익혀가고 있었다. 올해는 원주 반계리 가야지, 남양주 묘적사는 가까우니까 꼭 가봐야지, 내려오며 놓쳤던 맛집도 들려야지 하면서 한 뼘 높아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침울해졌을 때 은행알들이 환한 기억이 되어주기를 기대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뵙고 싶다기보다 김치, 된장찌개 같은 그 손맛이 더 아쉬웠다. 그리움은 무언가에 비롯되어 솟아나는 감정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