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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관 Jul 25. 2024

버스를 기다려


내게서 시 강의 듣는 분들 단톡방에서 연극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3시간짜리 <햄릿>이란다. 무력감에 젖어있는데 잘됐다. 감정의 공기가 탁하면 환기해야한다. 사실은 관람료가 엄청났다.지갑이 빈 건 아니고 넷플릭스 영화를 매일 한 편씩 보기에 그럴 뿐이다. 선량한 분들이고 얼굴만 봐도 서로 흥겨우니 가끔 만났다. 상금, 지원금 같은 공돈(?)이 생기면 밥 먹는데 점심에 만나서 저녁 먹고 헤어지곤 했다. 사랑은 좋을 때 더 쌓이지만 정은 어려움을 함께 할 때 쌓인다. 사랑엔 유통기한이 있지만 정은 숙성기간이 있다. 어떤 게 좋아서 만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정이나 사랑보다 느낌이라 대답하련다.

     

폭우경보 내리고 경의중앙선 출발지인 문산에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햄릿 보러 나왔다. 버스도 안 오는데 기다리는 방법 외엔 방도가 없다. 어깨 넓은 버스가 어서 오기를, 이름 없는 불안을 데려가라고 오는 쪽만 바라본다. 

버스를 기다렸다. 늦었을 때는 빨리 오라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너무 일찍 나와 버린 때는 하릴없이 정거장 차양이 짧아 빗물에 바지 젖는 것이나 불평했다. 버스기사는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막내딸과 이야기할 테고 운행시각 정시에 대려고 초조할 것이다. 기다리는 나는 안중에 없을 테니 그이가 무정한 건 아니고 다만 그럴 뿐이다. 또 그가 기다릴 누군가를 위해 운행을 서두르는 것도 비정상이다. 이러다가 전철역에서 30분 가까이 전철을 기다렸다.     

전지작업이 동네를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팔다리 잘린 나무들을 보면 간판을 가려서 생업에 지장을 준 것, 가을이면 이파리들을 떨궈서 지저분하게 만든 것 같은 죄들이 떠오른다. 구청 가로정비 과장과 아파트 관리소장일 텐데 누가 처벌한 것일까. 젖어 무거운 전지부스러기들을 치우는 작업자들은 비를 탓할 텐데 비는 그런 배려 없이 쏟아진다. 우린 외부환경이 자신까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을 심란해하지만 그건 내 기준과 윤리에 맞지 않는다는 불평일 뿐이다. 이것이 삶의 부조리다.

탄식, 절망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행태다. 난 생활력이 없는 게 아니라 이해력이 부족했음을 알았다.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자살하는 것,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반항심이 모자랐다.  

   

돌아오는 길에 햄릿의 ‘구원이 불가능한 상태’, 배우와 나 사이의 단절을 곱씹었다. 무대로 끌려올라간 적 있었는데 당혹보다 들이닥친 상황에 대한 이물감이 컸었다. 낯설었을 뿐인 것이다. 낯설다고 겁먹지 말자. 햄릿을 봤더라도 그에 대한 글은 자폭과 다름 아니다. 그 숱한 분석과 오해와 현학을 어찌 앞설 수 있겠나. 글쟁이로 성공하려면 남이 하는 짓은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한다. 전철에서 핸드폰으로 쓴 까닭에 글이 멈춤과 출발의 반복처럼 단속적이다. 까뮈의 그 담뱃불이 폭우에 꺼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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