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오름 - 협재해수욕장 - 제주불빛정원
아침에 일어나면 창밖 풍경이 참 좋다. 구름 낀 빛바랜 청색 하늘, 그보다 짙은 색 바다, 비양도와 한림읍까지 커다란 액자에 담긴 사진같다.
아내가 외출하는 첫날이다. 서울에서 온 지인들과 여행 일정을 같이 해 난 아이와 온전히 이틀을 보내야 한다. 조그만 오름 오르기, 선착장 낚시, 바닷가 모래놀이하기로 어제저녁에 같이 계획 짰다. 사전 답사에 점심 식사 예약도 할 겸 이른 아침 읍내에 갔다.
아이는 우동을 좋아한다. 돈가스도 잘 먹는 편. 멀지 않은 곳에 수OO이란 이름난 집이 있다. 열 시 즈음이나 여는 식당 앞에는 예약자 명부가 홀로 놓였고, 이십 분 단위 네 팀까지 원하는 시간을 고를 수 있다. 일곱 시도 되기 전이지만 앞서 온 사람, 내 뒤로도 곧 줄 설 정도로 북적였다. 이름과 주문할 음식을 적고 인접한 포구로 갔다.
방파제에 섰다. 고기 낚는 상상은 내게 퍽 흥미로웠으나 좁은 곳에 긴 시간 머무는 건 일곱 살에 무리인 듯했다. 낚시터 고르는 건 그만두고 주위를 걷다 협재해변 반대로 가 포구부터 해안으로 이어진 풍경을 찍었다. 가만히 사진을 보다가 문득 벽돌집이 없었다면 바닷가가 밋밋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한쪽 끝 붉은색 건물은 파란색으로 정적인 해안과 하늘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돌아오는 길 시간이 좀 남아 금능, 월령포구까지 해안도로를 따라 잠시 드라이브를 즐겼다.
아내와 잠시 작별하고 둘이 이달오름에 갔다. 숙소에서 십오 분 거리. 차에서 내려 너른 풀밭을 가로질러 안내표지판에 있는 출발 지점에 도달했으나 입구는 여러개 굵은 파이프로 가로막혔다. 한참 두리번거리다 되돌아와 근처 주민에게 물으니 기르는 말이 나오지 못하게 막아두었을 뿐 그 길이 맞다고 한다. 안으로 나있는 오르막길 따라 얼마 가지 않았을때 아이가 비명 지르며 멈춰 섰다. 처음 보는 말똥 무더기에 놀란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더 가지 않으려 해 하는 수 없이 산등성이까지 업었다. 왼쪽은 촛대봉, 오른쪽은 이달봉 두 봉우리 사이 언덕에 섰다. 간간이 오름 솟은 구릉지대는 넓은 풀밭에 드문드문 관목이 자라 마치 초원 같았다.
잠시 쉬다가 정상으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마침 벌 치는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입구는 올라오던 중 있었으나 오는 사람이 적어 수풀에 가려졌다. 오르막 계단 사이사이 다시 똥 무더기를 피해 십여 분을 더 걸어 꼭대기에 다다랐다. 멀리 한림읍과 바다를 보고 내려오는 길, 풀 먹는 말 한 마리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낯선 사람이 가까이 다가선 데 놀라 ‘푸르륵’ 큰 소리를 냈다. 덩달아 겁먹은 사람도 마주 보아 경계하며 빙 둘러 갔다. 계속 헤매고 당황했으나 이 역시 새로운 재미였다.
한림읍으로 돌아와 예약해 둔 식당으로 갔다. 다시 가고 싶은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다. 돈가스 때문이었다. 우동은 끝까지 존득함을 유지하는 면발이 좋았으나 국물은 약간 짜고 평범했다. 반면 돈가스는 한입에 반했다. 아이에게 권하니 나머지를 다 먹겠다는 통에 우동만 내 몫이었다.
한낮 협재해변은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녹색 비양도와 에메랄드빛 바다는 검은 바위와 은빛 모래에 대비되어 더 아름다웠다. 사람들 대부분은 천천히 산책을 즐겼고,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바닷가 놀이에 한창이었다. 아직 사월이지만 물에서 서핑하는 사람까지. 그들 틈에 껴 해먹을 설치하고, 모래놀이 장난감을 펼쳤다. 아이는 내가 퍼 나른 모래로 성을 쌓더니 땅을 파기 시작했다. 혼자 할 수 없을 만큼이 되자 이제는 아비에게 부탁했다. 어깨까지 들어갈 정도로 파는 게 의미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참 재미있어했다. 나 역시 그랬을까, 그렇게 한참을 보냈다.
밖에서 좀 더 시간 보내기로 해 불빛으로 꾸며 놓은 정원에 갔다. LED 전구로 공룡, 태양계, 제주도 등을 형상화한 모형이 전시되었다. 해가 있을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원색 빛이 어두운 저녁을 화려하게 밝혔다. 농구나 원반 넣기 등 처음 만난 동전 게임기까지 함께 하며 남은 저녁을 즐겼다.
여섯 날 가운데 가장 긴 외출, 가로등도 비추지 않는 깜깜한 시골길을 달려 돌아왔다. 어깨 아프다는 말에 자진해서 주물러준 일곱 살에게 고마웠고 한편으로 대견했다. 내일도 둘만의 하루가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