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제주 협재 일기 열이레 < 산딸기 >

by 준환

따라비오름 – 석부작박물관 – 서귀포올레시장


지인의 추천에 따라 따라비오름과 김영갑모두악갤러리, 온평포구를 보려 남동쪽으로 갔다.


한림에서 오름이 있는 표선면 가시리까지 한 시간 남짓하다. 처음 이용한 산록남로는 중산간로와 다른 맛이 있었다. 높은 침엽수 대신 아기자기한 활엽수가 도로를 따라 늘어섰고 간밤에 내린 비로 나무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숲 속을 지나다 언뜻언뜻 바다 보이는 풍경도 괜찮았다. 문제는 비였다. 출발할 때부터 내린 게 굵다, 가늘다 변덕스러워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좁은 외길 포장도로를 따라 십여 분 들어가니 갑자기 넓게 터진 곳이 나왔다. 지금껏 오름 초입 길은 대체로 이랬다. 앞서간 아내와 아이를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눈이 닿는 끝까지 평평한 풀밭 위로 난 갈래 길에 작은 나무가 표지판과 나란히 서 있었다. 정상을 향해 가로로 팔 뻗어 안내하는 모양은 길 잃을까 걱정한 누군가 일부러 심어 놓은 듯했다.



야트막한 언덕이 나오는 지점에 따라비오름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었다. 가을에 억새가 필 때면 제주 삼백육십팔 개 오름에서 가장 아름다워 오름의 여왕이라고 불린단다. 북쪽에 새끼, 동쪽에 오지와 장자오름이 있어 가장 격으로 “따에비”라고 불리던 것이 “따라비”가 되었다는 설이 있고,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하여 “땅하래비”로도 불린다. 다행히 비가 잦아들고 따뜻해 비록 경사진 흙길이지만 걷기 좋았다. 곧 나타난 오르막 계단에서 툴툴댄 야니. 당연한 것이려니 하고 업었는데 아직 회복되지 않은 다리에 어제 한라산만큼 힘들었다. 다만 아빠와 달리 희희낙락한 모습을 보상 삼아 천천히 올랐다.


정상 부근에는 수풀 사이로 산딸기가 보였다. 아이는 올봄 처음 맛본 후 여러 번 되뇌었는데 예상치 못한 선물을 만나 곧 채집에 몰두했다. 바람 따라 불어오는 나무 향기와 정상을 따라 난 산책길, 비가 내려 주위가 온통 구름으로 가득한 것에도 관심 가질 법했으나 빨간 열매에만 매료되었다. 다시 강해진 비바람에 안개가 짙어졌다. 서둘러 내려오다 이곳은 오름이 두 개라는 걸 알았다. 우리가 간 곳은 큰사슴이오름, 따라비는 반대편. 미련이 남아 가려던 곳에 홀로 올랐으나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풍경이 빼어나다는 말에 부린 욕심이었다) 아비가 다녀온 동안 아들은 여전히 빨간 것에 빠져 옷이 젖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싱 말싱 말랑하고 싱싱” 잠깐 사이 지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몰래 한 개씩 입으로 가져갔다. 누군가의 쉬가 묻어있을 수도 있다며 씻어 먹으라 했으나 새콤달콤한 맛의 유혹이 강했나 보다.



오늘 가장 가고 싶은 곳은 김영갑두모악갤러리였다. 늦은 점심 먹으며 뭔지 모를 불안이 들었다. 틀리지 않은 예감, “휴무” 두 글자. 온라인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래다가 계속 내리는 비에 위안을 얻었다. 내부 전시뿐 아니라 밖에도 볼 것이 많아 날씨 좋은 날 오는 편이 좋았다.


석부작박물관은 서귀포 시내 가까이 있다. 입장을 확인하며 “실내 전시죠?”라 물었다. 퉁명스럽게 돌아온 목소리, “실외 전시인데요.” 옆에서 듣던 아내는 소리 죽여 킥킥댔다. 비가 그치지 않아 일부러 실내 전시장을 찾아왔는데 오늘은 삐거덕거리는 날이다. 애써 왔으니 우산 쓰고 관람로를 따라갔다. 길 따라 선 하귤은 관상용으로 10cm에 이를 정도 월등히 크다. 모양 못지않게 향기도 뛰어나 나무 사이로 달콤한 냄새가 가득했다. 실내 전시관은 오랜 기간 수집한 현무암 수석, 기이한 모양의 나무뿌리와 다양한 석부작이 많았다. 이름도 생소한 석부작은 현무암 자연석에 풍란 및 야생 화초류를 착근시킨 재배식물이다. 암석에 뿌리내린 분재. 바위틈에 달라붙어 노출된 뿌리로 양분을 얻는 풍란도 신기했으나 박쥐난이 가장 독특했다. 잎을 펼친 모양이 박쥐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야자열매껍질에 뿌리내려 키운 것을 전시 중이었다. 열매나 나무에 뿌리를 내리면 덩어리 같은 뿌리줄기에서 두 가지 잎이 모여 나온다. 영양엽은 콩팥 모양이고 밑에서 뿌리줄기를 둘러싸며 흙을 감싸고 물기를 유지했다. 다른 잎은 그물맥 있는 연한 녹색으로 어릴 때는 잔털이 있다. 박쥐란은 공기에서 수분을 섭취하므로 가끔 영양제만 주면 된단다.


바깥에는 제주 희귀 식생을 전시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꽃들이 인상 깊어 나중에 찾아보려고 일일이 사진을 찍어 두었다. 아주 큰 식물원을 같은 비율로 줄여놓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었다.



돌아오며 다시 서귀포올레시장에 들렀다. 지난번 분점에서 산 마농치킨은 마늘이 많이 들어가 잡내 없이 독특한 향이었고, 식은 것도 눅눅하지 않아 자주 떠올랐다. 일부러 찾은 본점, 역시 오늘은 뭔가 어긋났다. 강한 냄새로 살 때부터 고개를 갸웃했는데 간 역시 셌고 진한 맛은 느끼했다. 아깝지만 몇 점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때로는 원조를 고집하지 않아도 좋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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