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제주 협재 일기 열여드레 < 새로움 >

by 준환

한림공원 - 수산봉


여행지에서 만족을 좌우하는 건 새로움이 상당히 큰 몫이다. 특히 첫 느낌이 강렬했던 때는 더 그렇다. 오늘이 그랬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협재 우동집에 가고 싶어 했다. 나는 첫 주 아이와 단둘이 갔던 집이었다. 예약 노트에 가장 이른 시간 이름을 써둔 덕에 전망 좋은 자리를 받았다. 연녹색 빛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비양도가 창을 가득 채웠다. 이곳이 처음인 아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하고 국물이 자작하게 깔린 쫄깃한 우동 면발에 매료되었다. 그에 반해 나와 아이는 입맛이 없는 데다 아침부터 과한 차림인 듯 몇 젓가락 들지 않고 내려놓았다. 분명 전과 다름없는 맛이지만 사뭇 달랐다.


날이 좋아 야외 식물원에 갔다.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시각, 명소인 한림공원은 단체로 버스 타고 온 꼬마 손님들을 포함해 이미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10만 평 넓은 부지는 제주와 외국에서 가져온 식생으로 실내 온실, 야외 식재, 분재 수석관, 월 주제별 식물관 등이 꾸며져 있었다. 공원이 설립된 1971년 가장 먼저 중앙 산책로가 들어섰다. 바닷가 척박한 땅에 식물이 쉽게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흙을 새로 깔고 그 위에 처음 야자나무를 심었다. 그건 이제 십수 미터 자라 식물원의 중심이었다.


관람로를 따라 실내와 실외 식재를 둘러봤다. 천정까지 키가 큰 미국 선인장, 재래종 감귤, 방울방울 비자나무, 어제 본 박쥐난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눈길을 끈 건 극락조화였다. 녹색 줄기는 몸통, 오렌지색 꽃잎은 날개, 청금석 색깔 잎은 부리를 닮아 언뜻 날개를 편 새처럼 보였다. 원색에 가까운 선명한 빛깔이 무척 화려했다.



가운데 야자나무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쌍룡과 협재 두 용암동굴이었다. 현무암 돌로 꾸민 입구를 지나니 바깥과 달리 서늘했다.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천정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져 있었다. 머리 위에는 큰 용 쉬던 자리인 듯 사람 키 정도의 둥글넓적한 또 다른 굴이 보였다. 위에서 떨어져 내린 사각 돌이 방울방울 내려온 석회수에 조금씩 자라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활석(活石)이란 이름을 붙일 만했다.



출구로 나와 수석과 분재가 함께 전시된 곳으로 갔다. 자연 그대로 화산탄을 이용해 어떤 건 작은 나무의 보금자리였고, 작은 연못이 된 암석도 있었다. 작은 돌로 지게 진 아낙네와 집, 담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집과 흡사해 아이가 계단을 올라 똑똑 문을 두드렸다. 소인국에 방문한 걸리버였다. 분재관에는 마을 어귀에 선 나무같이 크고 잎이 풍성한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있었다. 실제로도 250년 넘게 자랐다.



주제 식물관은 월별로 나뉘어 운영되는데 5월은 부겐빌레아다. 아름답고 알록달록한 포엽과 날카로운 가시가 특징인 덩굴 식물로 18C 프랑스 식물학자가 브라질에서 처음 발견했다. 하양, 분홍, 빨강, 주황, 노랑, 보라 등 다양한 색 중 이곳에 뿌리내린 건 빨강이었다. 나뭇가지 따라 천정을 빨갛게 뒤덮은 꽃잎은 밝은 햇빛을 받아 더 선명했다. 꽃잎이라 생각했던 건 사실 잎사귀가 변형된 꽃 싸개였고 빨강 꽃대 끝에 하얀색 도드라지게 핀 작은 것이 꽃이었다. 관리인은 꽃잎이 온실 안에 있는 수로의 끝까지 물 따라 흘러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귀가 쫑긋해진 우리는 각자 바람을 담아 꽃을 띄우고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봤다. 공원 곳곳을 가고 싶었으나 하루에 다 보기는 무리였다. 연꽃 핀 연못과 시원한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폭포에서 잠시 쉬었다가 나머지는 지나치듯 보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어제의 산딸기 맛을 잊지 못했다. 오늘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꾀어 야트막한 오름으로 갔다. 애월읍의 수산봉은 백 미터 남짓한 높이지만 옆에 저수지가 있어 색다른 풍경이었다.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에 키 큰 나무에 매달린 그네가 눈에 들어왔다. 저수지 쪽으로 다리 펴고 앉으면 아래 경치가 넓게 보였다. 비탈의 높이에 앞이 트여 있어 아슬아슬하게 타는 재미도 있었다. 아이는 서너 번 왔다 갔다 하다가 내려다보는 비탈이 무서웠는지 이내 내려오고 아내가 앉았다. 어른에게 잘 맞는 듯 오랜만에 타는 그네에 푹 빠졌다.



산 위 전망은 수풀에 가려 크게 볼 것이 없었다. 내려오는 길옆 풀숲에 비로소 빨간 딸기가 보였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듯 양이 많았는데 자세히 보니 뱀딸기였다. 따지 않으려 했으나 아이의 고집에 한 움큼을 담아왔다. 물에 씻지도 않고 급히 먹었지만, 맛이 없는지 결국 모두 버렸다. 약용으로나 쓰이는 게 입에 맞을 리가 없었다.


가려던 저수지 산책길은 건너편에 있어 그길로 내려왔다. 차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아주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곰솔이란 소나무였다. 백곰이 저수지의 물을 웅크려 마시려고 하는 모습이 연상되어 이름 붙여진 만큼 웅장하고 우람한 덩치였다. 400여 년 전 수산리 마을이 생길 때 심어졌다고 하더니 긴 시간 동안 이렇게 커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무 아래 땀을 식힐 겸 잠시 앉아 김밥으로 늦은 점심을 대신했다. 저수지 가에 앉아 경치를 바라보니 이곳이 제주인지 뭍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 곰솔은 높이 11미터, 너비 26미터이다. 물에 가지 드리워진 모습이 아름다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오늘 가본 곳들도 괜찮았다. 다만 감흥이 덜했다.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긴 여행과 비슷한 풍경에 익숙해진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공교롭게 식구 셋 다 같은 느낌이니 여행 취향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에 위안 삼아야겠다. 매일 만족하기 어려운 일. 한참 후에는 비슷하게 경험했던 하루가 더 기억날 수도 있겠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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