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제주 협재 일기 열엿새 < 한라산 >

by 준환

한라산


언제 갈까 한참 망설였다. 지난주 예약한 것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며칠 미루었다. 날짜가 다가오는 동안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일기예보를 수시로 쳐다보며 고민했으나 무엇보다 혼자 가기 싫은 마음이 가장 컸다. 그래도 큰비는 없어 예정에 따르기로 했다.


하루 한라산 방문은 예약해 둔 천오백 명만 가능하다. 늘어난 등산객에 자연훼손이 점점 빨라지기 때문이다. 백록담 정상까지 탐방로는 성판악과 관음사 두 군데의 지원센터에서 시작되며 여름철은 오전 다섯 시부터 등산할 수 있다. 출발 시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늦거나 취소신청 없이 입산하지 않으면 나중에 일정 기간 탐방로를 이용할 수 없다.


비교적 가까운 관음사탐방지원센터에서 가장 빠른 시각 출발하기로 했다. 전체 등산은 대략 아홉 시간, 겨울철은 오후 한 시 반, 여름철은 오후 두 시 반 정상에서 강제 하산 되기에 일찍부터 여유롭게 오르고 싶었다. 예전 설악산과 지리산 정상을 등산할 때는 대피소에서 하루 묵고 출발 전 물에 끓인 누룽지와 김치로 요기했다. 든든하고 소화가 잘돼 아침 식사로 그만한 게 없었다. 오늘도 후루룩 마시다시피 하고 여벌 옷과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겨 길을 나섰다.


일출이 지난 지 오래나 구름이 잔뜩 껴 어둑했고, 홀로 초행길에 잠까지 설쳤다. 작은 긴장을 안은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탐방센터에 도착했다. 이미 여러 사람이 입산한 듯 주차장에 차가 많았다. 입구로 가서 휴대전화로 받은 QR코드를 인증했다. 이제 시작이다.


한라산 등산로는 대부분이 돌길이다. 돌길이 아닌 곳은 야자나무로 짠 덮개가 깔려 있어 흙을 거의 밟을 수 없다. 원시림에 가까운 숲은 한참 위까지 나무로 덮여 하늘이 드러나지 않았고 등산로 오른편에는 계곡이 있었다. 용암이 중첩되어 식은 지형과 숨골, 유달리 짙은 색의 이끼가 눈에 띄었다. 잠시 후 길이 사라지고 군데군데 물 고인 계곡 바닥이 나타났는데 양옆은 출입을 막는 굵은 줄이 둘러쳐졌다. 지금이야 지나다니지만 칠팔 월 장마철은 엄청난 물줄기가 뿜어져 흐를 것이 짐작되었다. 한 시간 정도 평탄한 길을 걸어 탐라계곡 목교에 도착했다. 넓은 계곡 위를 가로지르는 튼튼한 나무다리를 지나자마자 첫 번째 난관이 나타났다. 아파트 십 층 정도 높이의 좁고 가파른 계단, 힘에 부친 어르신들은 여러 번 나누어 올랐고 젊은 사람들도 쉽지 않았다. 마지막 계단에 닿으면 바로 두 번째 힘든 구간. 삼각봉 휴게소까지 약 삼 킬로미터 오르막은 그나마 평평하고 넓은 계단으로 바뀌었음에도 걸음은 느려지고 어서 끝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예전 더 어려웠던 일들을 떠올리며 쉬지 않고 걸어 대피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매점이나 숙박시설 없이 폭설이나 폭우를 대비한 피난 장소였다. 땀에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고 바깥에 앉아 떡으로 간단히 요기했다. 쉬어갈 겸 전망대에 오르니 등 뒤로 뾰족한 봉우리가 삼각 모양이었다. 휴게소 이름은 그곳에서 연유되었나 보다. 백록담 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또 다른 출입구를 지났다. 하산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서 오후 한 시부터는 이곳에서 위쪽으로 통행이 제한된다.


왕관바위까지 일 킬로미터 남짓은 경사가 좀 덜했다. 나무 높이는 눈에 띄게 낮아져 멀리 능선이 훤히 드러났다. 계단이 끝난 지점부터 큰 바위 곁에 널빤지로 만든 잔도가 평평했다. 기분 좋은 산책길을 따라 출렁이는 두 번째 나무다리 용진각 현수교를 건넜다. 다리 가운데에서 본 아래쪽 계곡은 까마득히 깊었고 위쪽 봉우리는 닿지 못할 듯 높아 점점 높아진다는 게 실감되었다. 왕관바위는 평평하고 넓은 데다 드문드문 풀 자란 모습이 흡사 윗세오름으로 가는 길 같았다.


어느덧 마지막 구간, 백록담까지 약 한 시간 남았다. 키 큰 활엽수를 대신해 뾰족한 잎의 작은 구상나무와 조릿대가 자리 잡았다. 살아있는 구상나무는 검은 줄기 녹색 잎, 죽은 것은 하얗게 변해 마치 다른 종인 듯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비바람 강한 거친 환경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올라갈수록 길이 평탄해지다가 봉우리들이 모두 눈 아래로 내려왔다. 백록담을 알리는 나무 표지와 산 중턱에 걸린 하얀 구름이 정상이란 걸 말해주었다. 바람은 시원하고 다행히 해가 비쳤다.



‘운해’라는 단어 그대로 솜뭉치 같은 하얀 구름이 발아래 있었다. 하늘을 가득 덮은 풍경은 바다를 직접 내려다보는 것만큼 좋았다. 비가 오지 않아 작아진 백록담과 급하지 않게 넓게 펼쳐져 몽골초원을 떠올리게 하는 비탈도 인상적이었다. 원나라 말기 기황후가 황제를 설득해 몽골과 환경이 비슷한 제주도로 거처를 옮기려 했다는 말이 지어낸 것만은 아닌 듯했다.


주변은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난생처음인 한라산 꼭대기에서 따뜻한 물에 만 밥과 참치통조림만으로도 충분한 아침을 먹었다.



올랐던 길을 그대로 다시 밟아 내려왔다. 남은 힘은 이제 바람과 하늘, 돌과 나무를 느끼는 데 할애했다. 고산지대에 자라는 소나무는 지대 낮은 곳에서 본 매끈하고 길게 뻗은 모양과 달리 가시만 남은 생선 같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나뭇잎이 빼곡했다. 강한 햇빛을 받아 투명하고 옅은 녹색이 되어 하나하나 찬란한 에메랄드였다. 조금 아래에는 나뭇잎 사이로 처음 보는 화려한 분홍빛 꽃이 있었다. 크고 탐스러운 것의 이름은 참꽃나무꽃이었다. 벌과 나비를 부르려고 길게 자란 암술과 수술이 보는 이를 매혹했다. 내려올수록 넓어지는 계곡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검은 돌 사이로 깊은 굴이 보였다. 모두 한라산에서만 볼 수 있는 전경이다.


하산길이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다. 지친 몸과 아픈 다리 때문에 움직이는 것만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올랐다는 성취감과 등산길에서 얻은 기쁨이 그걸 잊게 했다.


아침 여섯 시 이십오 분에서 오후 한 시 삼십칠 분. 한라산 등반 기록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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