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제주 협재 일기 스무하루부터 사흘 <K가족>

by 준환

< 첫째 날 >


반가운 사람들이 오는 건 유쾌하다. 여행지에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 낯선 곳에서 익숙함을 만나기 때문이다. 대학 친구 K와 가족은 두 번째 손님이다.


그에게는 사 학년 외동딸이 있다. 흰 얼굴과 진한 눈썹, 당당한 성격으로 또래에게 인기가 많다. 동생들도 살뜰히 챙겨 우리 아이는 삼 년 전 만남 후 계속 그리워했다. 이십 년 훌쩍 넘게 막역한 사이인 K는 누구보다 솔직하고 편안해 나 역시 기다렸다.



K 가족은 아침 비행기로 오자마자 말타기하러 갔다. 우리에게도 권했으나 아이는 말이 무서웠고 전날 피로가 남아 숙소에서 기다렸다. 점심 무렵 도착한 K 가족과 제주에서 첫 끼. 무얼 먹일까 고민하다 앞 손님들과 맛있게 들었던 보말죽 집에 갔다. 자신 있게 이끌었건만 센 조미료 향이 거슬렸고 전에서 풋내가 나 미안했다. 좋은 풍경으로 만회하고 싶어 협재해변으로 갔다. 맨발로 비취색 바다와 고운 모래 위를 거닐다 돌 틈에서 소라게와 보말을 잡으며 즐거워했다. 다만 오늘따라 유달리 물이 차 오래 있지는 못했다. 남쪽으로 달려 신창 해안도로 싱게물공원에 닿았다. 썰물에 드러난 돌 해변 위로 나무다리 산책로가 바다 쪽 멀리까지 뻗어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다 위 산책로 가운데 섰다. 며칠 전 오름에서 내려다본 들판은 황금 보리, 녹색 옥수수, 갈색 휴경지가 쪼로니 모였다. 우리가 서 있던 해안 또한 갈조, 녹조, 검은 돌과 푸른 빛 바다가 섞여 아기자기했다. 풍력발전기도 그 일부인 듯 이질감이 없었다.



첫째 날이 저물어 간다. K가 유달리 좋아하는 회 한 접시, 제주 특산물 고사리가 담뿍 담긴 감자탕을 하나 샀다. 일찍 시작했건만 저녁은 열 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술이 오른 김에 노래 반주 기계를 켜 고래고래 한 곡씩 불렀다. K가 잘하는 건 알고 있었으나 K의 아내와 딸은 그보다 한참 뛰어났다. 장인어른이 운영하는 노래방 때문인지 친구 아내 가족들과 모이면 K가 가장 떨어진다는 말이었다. 열두 시가 다 되어 단둘이 남았다. 자연스레 고민을 나누는 시간. 평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았기에 혼자 누른 고충이 느껴졌다. 상사와의 갈등, 정년, 미래 이제까지 잘 해왔으나 남은 난관도 만만치 않다. 어쩔 수 있나, 이렇게 의지하며 버티는 수밖에.

※ 다행히 해가 가기 전 팀장으로 승진했다.



< 둘째 날 >


K는 전기 자전거 타기를 제안했다. 이견이 없었으나 스쿠터나 전기 자전거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해 제주에 함께 여행 온 친구가 타던 스쿠터와 넘어져 복사뼈가 부러졌고, 그 바람에 일 년 넘게 고생했기 때문이다. 걱정과 달리 자전거 작동과 비슷해 어렵지 않게 탈 수 있었다. 조작이 서툰 아내는 K 부인 뒤에 앉았다. 각자 아이들을 태운 것까지 세 대가 쪼로니 서서 수월봉 아래 노을해안로 올레길을 따라 달렸다. 근래 가장 맑은 날, 보드라운 바닷바람을 즐기는 데 뒤에 탄 아이가 연신 “유~후.”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기쁘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그동안 트레킹처럼 어른 취향만 고집했다는 생각에서였다. 차귀도가 보이는 방파제에 잠시 내렸다가 수월봉으로 갔다. 꼭대기 정자에 서서 올라온 반대편 섬과 바다까지 크게 눈에 담아 가슴도 덩달아 넓어졌다.



제주도에 와서 두 번째 배낚시. 지난번 방파제 안 테우 체험과 달리 배를 타고 이십 분 정도 바다로 나갔다. 마치 거인이 손톱으로 할퀴어 숨겨왔던 가로줄 무늬가 드러난 것 같은 수월봉 해안 절벽을 등지고 닻 내려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냉동 새우는 고기가 좋아하나 쉽게 뜯겼다. 툭툭 건드리는 촉감에 바로 낚아채는 게 익숙하지 못해 소득 없이 헌납하기만 여러 번. 이윽고 반대편에서 K와 딸의 환호성이 터졌다.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든 낚싯줄 끝에 볼락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우리 아이는 배 위를 특별한 목적 없이 왔다 갔다가 했다. 제 키보다 긴 대를 가누며 걸리지 않는 물고기를 기다리기 불편했던 듯. 차라리 솜씨 좋은 선장님에게 붙어 그분이 잡은 게 모두 제 것인 양 으스댔다. K가 세 마리, 그의 부인과 딸이 각각 두 마리, 내가 세 마리. 오늘 출조한 수확이었다. 선장님이 몇 마리 잡아 주었으나 가져가 먹기 어려워 그대로 두고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기 이른 시간, 넓은 녹차밭이 인상적인 카페에 갔다. 수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앉아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산책하려다 비누 만들기를 체험했다. 딱딱한 원재료를 손으로 주물러 부드럽게 만들고, 녹차 같은 부재료를 넣어 예쁜 색이 나도록 섞었다. 다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드는 건 아이들에게는 생각보다 힘겨운 일이었으나 처음 하는 경험에 즐거워했다.


저녁, 바깥 기온은 적당하고 비양도에 걸친 해는 누그러진 빛이 맨눈으로도 보기 편했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 숙소 앞 테이블에 앉아 주인집에 미리 부탁해 둔 숯불 위에 고기를 올렸다. 곧 맛있게 먹을 거라 생각했으나 기대와 달랐다. 위를 덮은 석쇠에 바람길 막힌 숯불이 자꾸 사그라졌다. 익는 게 더뎠고, 주변 고양이들이 냄새 맡고 몰려드는 통에 동물이 무서운 K 아내는 얼마 먹지 못하고 집안으로 피신했다. 남은 삼겹살은 모두 고양이에게 던져주며 K와 둘이 남아 또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집안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넷이 앉아 밤 열두 시를 넘겼다. 너무 짧은 이틀 밤, 추억으로 가득했다.



< 셋째 날 >


마지막 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K와 선착장 낚시를 갔다. 팔뚝만 한 우럭과 도미의 꿈을 안고 선착장 계단에 앉아 낚싯줄을 드리웠다. 대여섯 마리 잡았는데 모두 엄지손가락 굵기에 길어야 한 뼘 크기다. K는 자잘한 손맛에 비해 들인 노력과 미끼값이 더 든다고 여겼다. 먼저 자리 정리하며 다음번에는 선상낚시 할 것을 제안했다. 그때는 좀 멀리 타고 나가서 큼지막한 놈을 잡아 직접 회 뜨고 구이 할 모양이다.


K는 숙소로 돌아와 집에 갈 채비를 했다.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맛보일 음식은 아이와 갔던 갈치구이 집이었다. K의 가족은 처음에 데면데면했으나 이내 크기에 놀라고 맛에 감탄했다. 다시 방문한 집들 대부분이 기대와 달랐으나 우리도 처음과 변함없음을 느꼈다. 함께 시킨 묵은지 고등어조림도 적당히 칼칼하고 단맛이 조화로웠다. 사실 그 집에서 내게 가장 의미 깊었던 건 무엇보다 주인의 배려였다. 제주의 갈치구이 집은 대개 낚시로 잡은 갈치를 쓰기에 종종 날카로운 바늘이 목에 걸린 채 조리되기도 한다. 오늘 그 집은 바늘이 있을 위치에 주홍빛 얇게 썬 당근을 올려놓았다. 주의 표시로 혹시 모를 부상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게다가 지난번에는 갈치 살이 덜 찼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다른 물고기를 더 구워 주기도 했다. 따뜻한 주인 할아버지의 마음 씀씀이가 도드라졌다.


K 가족의 비행기 시간이 조금 남아 삼양검은모래해변으로 갔다. 이름처럼 까만색 고운 현무암 모래가 쌓인 이색적인 바닷가. 저 멀리 바다를 향해 놓여있는 의자 두 개에 부부인 듯한 사람들이 하나씩 앉아 있었다. 인적 드문 한가로운 곳에 어울리는 편안한 모습이었다. 아이들과 해변을 몇 차례 왔다 갔다가 하니 벌써 네 시. 이제 갈 시간이다.



K는 조천읍에 들러 팥앙금이 든 쑥 빵과 소가 없는 보리빵을 샀다. 이 동네의 명물이란다. 같이 간 김에 우리 식구도 몇 개를 얻어 먹어보았다. 쑥 빵은 아이들이, 보리빵은 어르신 입맛인데 쟁여두고 먹을 맛이었다. 나도 따로 몇 개 사러 갔다가 K로부터 한 상자를 선물 받았다.


제주에서 두 번째 배웅. 체험도 여행의 큰 즐거움이란 걸 느끼게 해준 K가 고마웠다. 셋이 남아 또 며칠 허전함이 들겠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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