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세오름
제주도는 한라산 빼고 윗세오름이 가장 높다. 친구와 한 번, 아내와 둘이 갔던 데 이어 세 번째 올랐다. 지난 두 번은 등산로가 긴 어리목 매표소에서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어린 아들이 동반해 가장 짧은 영실코스를 골랐다.
영실 탐방로는 병풍바위와 윗세오름을 지나 한라산 남벽까지 이어진다. 다른 탐방로에 비해 등산로가 짧고 차로 높이 올라갈 수 있어 수월한 편이다. 한라산 풍광도 충분히 느낄 수 있기에 찾는 사람이 많으나 주차장이 좁아 주말이나 성수기는 가기 쉽지 않다. 오늘은 토요일. 늦게 일어나 출발하며 조금 걱정했다. 열한 시 넘어 도착한 시간, 예상대로 주차장 매표소 밖에 차들이 줄지어 있었다.
열 대 가까운 앞차 중 일부는 돌아가기도 했다. 우리도 일정이 빡빡했다면 마찬가지였겠으나 느긋하게 차례를 기다렸다. 열두 시면 새벽 다섯 시 처음 입산한 사람들이 멀리 남벽까지 갔다 돌아올 때였다. 한 대를 시작으로 차량이 줄지어 내려오니 앞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기뻐 손뼉 치기도 했다. 드디어 매표소를 지났다. 다만 등산로가 시작되는 영실 통제소로 올라가는 입구에 차량 개폐기가 하나 더 있어 한참을 더 기다렸다. 한 시간 가까이 걸려 모든 장애물을 지났을 때 우리 역시 손뼉 쳤다. 매표소에서 통제소까지는 2.5km. 성수기에는 매표소 밖에 차를 대는 사람들도 있기에 그 거리를 걸어 올라왔다면 등산로 입구에서 지쳐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제 관음사안내소 입구는 숲이 울창했다. 해발 620미터는 나무가 십수 미터 크기에 적당한 환경이다. 영실코스는 두 배 높은 1,280미터. 비탈지고 바람이 세 덩치 큰 나무가 뿌리내리기에는 맞지 않는다. 좀 더 가늘고 작은 것들이 무성히 자라 한낮의 밝은 햇살을 가려주었다. 이곳에서 병풍바위와 윗세오름의 중간까지는 난도가 높지만 기분 탓인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아이도 이 정도면 정상까지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며 의기양양했다. 아니나 다를까 1.5km, 삼십 분가량 걸었을 때 마의 구간이 나타났다. 익숙한 나와 달리 아내와 아이는 점점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 병풍바위와 영실 오백나한 절경이 나타날 무렵에는 계단을 모두 오르기만 해도 좋으리란 심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뗐다.
사이사이 아내가 챙겨간 사탕을 먹으며 등산로 곁에 있는 작은 쉼터에 앉았다.
저 아래 빽빽한 나무숲 사이로 시작 지점이 보였다. 아이는 처음 올라온 높이에 스스로 대견해했다. 날씨는 매우 맑아 멀리 산방산은 물론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아마 이런 날 백록담에 올랐다면 추자도도 보이지 않을까. 충분히 쉬고 둘을 독려해 다시 올라갔다. 좁고 높은 계단은 끝났으나, 오르막은 여전했다. 아이의 포기하려는 모습에 그때부터 업었다. 잠시 후 기력이 돌아온 듯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여기 높이는 몇 미터야?” “얼마나 더 가?” 이십오 킬로그램 무게를 지고 일일이 대답하기 어려웠다. 조용하지 않으면 내린다는 협박 후에야 비로소 조용해졌다.
능선과 기암절벽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났다. 곧 저 멀리 목적지인 윗세오름과 백록담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리로 향한 나무 길 주변은 대체로 평탄했다. 누런 조릿대 가득한 들판에 군데군데 물이 고여 수생식물이 살고 있었다. 높은 산 위에 몽골초원 같은 풍경, 오늘 이걸 보기 위해 왔다. 등산로에서 가장 쉬운 구간이나 바람이 매서웠고 이곳의 오월은 아직 찼다. 북풍에 나그네가 옷깃을 단단히 여미었듯 가진 옷을 모두 껴입고 천천히 걸어 윗세오름 대피소에 다다랐다.
한 동은 공사 중이고 나머지 한 동은 휴게소로 온전히 개방되었다. 아내와 둘이 왔을 때처럼 따뜻한 사발면을 기대했으나 매점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컵라면 먹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싸 간 빵과 음료로 대신했다. 잠시 쉬다가 남벽으로 이어지는 길 입구 기념비로 갔다. ‘윗세오름’ 네 글자를 사이에 두고 셋은 활짝 웃었다. 일곱 살 아들과 함께 포기하지 않고 험한 산을 올랐다는 기쁨도 컸다. 오늘은 한동안 내 등에 업혀 올랐으나 점점 혼자 힘으로 가능할 거다. 바람 부는 평평한 길을 다시 지나 백록담을 사진에 담으며 작별했다.
아이는 내리막길을 따라 인상 깊던 장소를 되짚었다. 사탕 나눠 먹은 곳, 업힌 곳, 미끄러진 곳, 아픈 다리를 쭉 펴고 시작점을 조망한 곳까지 세세히 알고 있었다. 첫 길었던 등반이 새롭고 의미 깊었기 때문일 터였다.
아내는 하루 수고에 보답으로 금주령을 잠시 풀었다. 추운 바람 따듯한 국물이 생각나 샤부샤부 집에 들어갔다. 흑돼지를 조금만 시켰다가 냄새 없이 고소한 맛이 좋아 아이와 여러 접시를 더 먹었다. 창가에서 바라본 비양도 앞바다는 뉘엿뉘엿 해가 졌고, 일렁이는 파도가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소주 한 잔 곁들이니 하루가 참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