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제주 협재 일기 스무나흘 < 제주시 >

by 준환

캐니언파크 - 용두암 – 용화사 - 제주박물관


5월 18일. 제주도에 온 지 24일째다. 날짜를 센 이유는 초여름 날씨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과 이삼일 전만 해도 기온이 불규칙하고 바람이 서늘해 긴 옷을 꼭 갖고 다녀야 했다. 이제부터 낮은 항상 덥다.


남은 시간은 일주일, 내가 계획한 일은 대체로 마쳤다. 돌아가기까지 아이에게 맞추고 싶어 일어나자마자 물었다. 여러 선택지에서 고른 건 역시 동물이었다. 제주에는 큰 실외 동물원이 없으나 새와 작은 육상 동물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중에 생김새 독특한 사막여우가 있는 곳을 골랐다.


제주 시내 있는 일 층부터 삼 층까지 규모 실내 동물원에는 뱀과 도마뱀, 카멜레온, 수달, 양, 미어캣, 여우, 새 등 다양했다. 아이가 정작 관심을 가진 건 사막여우 대신 먹이 체험이 가능한 동물들이었다. 양, 수달, 유기된 고양이. 그중에서 잘생긴 외모에 친근하게 다가온 고양이를 가장 좋아했다. 아내와 키우다 처남 집으로 보낸 지금 열여섯 살인 고양이가 아직 집에 있다면 둘은 좋은 친구가 됐을 텐데. 한 층 위에 있는 사랑앵무가 가득한 방으로 갔다. 씨앗을 먹이로 들이밀자 두려움 없이 손 위로 날아와 딱딱한 부리로 쪼아댔다. 어깨와 머리에도 앉는 모습에 좀 무서운 듯 울상 지으며 익숙해지려 버텼다. 일 층으로 내려오니 깊지 않은 카약 체험장이 있었다. 지나치려 했으나 조르는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노를 들고 앉았다. 오랜만에 하는 서툰 노 젓기에 방향 잃은 배가 이리저리 돌고 물이 튀어 엉덩이가 다 젖었다. 언짢은 아비와 달리 느긋하게 모형 물고기잡이를 즐겼다.



가까이 용두암이 있다. 용머리를 닮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지만 내 눈에 색깔은 물론 모양마저 온몸이 까만 가마우지 같았다. 한낮이 너무 뜨거웠다. 시원한 계곡 바람이 불어오는 용연구름다리로 갔다. 제주도 중심에서 발원한 물은 사방으로 깊은 계곡을 만들어 내려온다. 한라산 부근에서 생겨난 민물이 바닷물과 만나 천제연폭포나 쇠소깍보다는 작지만 그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출렁이는 다리를 건넜다. 계단 아래 계곡 따라 한적한 산책길이 보였는데 정비 중이라 가지는 못했다.



길가의 작은 절은 여행자들에게 좋은 쉼터다. 짧은 휴식이 필요할 때 청량한 냄새 맡으며 삼배하고, 바른 자세로 앉으면 피로가 사라진다. 아이 역시 제주도에서 이런 시간을 참 좋아한다. 용화사에 와 평소처럼 하더니 엄마에게 돈을 받아 보시했다. 아빠와 엄마의 건강, 갖고 싶은 장난감을 위해 빌었다는 말에 살짝 대견스러웠다.


시내 제주박물관에는 추사의 세한도가 있었다. 김정희는 안동김씨 세력의 탄핵으로 서귀포 대정으로 귀양 보내졌다. 쉰다섯 늦은 나이였다. 구 년간 유배 시절 제자 이상적의 후원은 변함없었고, 추사는 그 마음에 감복해 한 폭의 두루마리로 보답했다. 첫 면에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배경으로 그가 머물렀던 단출한 집이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힘차고 예술감 넘치는 필력으로 ‘완당세한도’ 제목과 그림 그린 경위가 쓰여 있었다. 뒤쪽은 그의 예술성을 칭송하기 위해 청나라 문인들이 앞다투어 보내온 서한들로 가득 채워졌다. 나라 밖에까지 존경받는 학자가 시대를 이끌지 못하고 예술가로만 남은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 물론 세한도는 어려움을 이겨낸 결실이었겠지만. 전시관 출구에는 장 줄리앙 푸스 감독이 제작한 ‘세한의 시간’이 재생되었다. 김정희가 유배지에 와서 느꼈을 고난의 감정이 7분가량 흑백 영상에 잘 담겨있었다.


박물관은 제주의 다양한 유물과 역사도 폭넓게 전시하고 있다. 선사시대 유라시아 대륙의 끝자락에 붙어 있다가 빙하기가 끝나며 섬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출토품을 통해 시기별로 고증되었다. 그 후 탐라국이 결성되어 고려에 복속되기 전까지 수백 년 주체적인 해양 세력의 역사가 있었다. 자주적인 유전자는 사라지지 않고 삼별초 항쟁과 4.3 사건에서 발현되었다. 수많은 희생을 남겼음에도 체제는 그대로였으나 자주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항거한 건 기억해야 할 듯하다.


제주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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