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밀양강을 따라간 누정의 하루(1)
월연정과 금시당

강과 정자 사이에서 옛 선인을 만나다

by 허정호

밀양강을 따라간 누정의 하루(1) 2026.3.5. 목

(오연정, 월연정 그리고 금시당)

아침 9시가 조금 넘어 오연정에 도착했다.

길가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무심코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와 천천히 올라갔다. 그렇게 해야만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른 시간이라 방문객은 아무도 없었고, 공간에는 고요한 적막이 감돌았다.

오연정은 조선 명종 때 문신 손영재 선생이 만년에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별서다. 넓은 뜰에는 우람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정자를 지키듯 서 있었다. 11월이면 이곳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 풍경을 그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오연정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소박한 양반집을 닮은 아담한 한옥처럼 정겹다.

마루에 앉아 바라보니 소나무 사이로 밀양강이 흐르고, 그 너머로 이어진 산자락이 잔잔하게 다가왔다.

나오는 길에 들른 화장실 문고리에 꽂힌 숟가락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문득 옛 시골집 문고리에 꽂혀있던 숟가락이 떠올랐다. 사소한 풍경 하나가 기억을 불러냈다.

오연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월연정으로 향했다.

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1900년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월영터널을 지나자 입구가 나타났다. 별도의 주차장이 없어 입구 넓은 곳에 차를 세웠다.

월연정은 7~8월 배롱나무(백일홍)가 필 때 찾으면 좋은 곳이다. 지금은 개화 시기가 아니라 꽃은 없었지만, 기와지붕과 담장이 붉은 꽃과 어우러질 풍경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했다. 강변을 따라 이어진 배롱나무 사이를 지나 월연정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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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경당과 월연정은 추화산 기슭, 밀양강과 단장천이 만나는 절벽 위에 자리한 정자와 별장이다.

하늘의 달과 강물에 비친 달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에서 ‘쌍경’과 ‘월연’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쌍경당을 지나 마주한 돌다리는 소박하면서도 정겹고, 그 위를 건너는 순간 풍경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몇 계단을 올라 월연정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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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너머로 내려다본 밀양강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그 위로 옛 선비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월연정을 내려와 쌍경당에 들어섰다.

봄을 기다리는 정자와 주변 풍경은 고즈넉했고, 마치 붉게 피어날 배롱나무의 여름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쌍경당 담벼락에 핀 매화가 배롱나무꽃 대신 화사하게 피어 있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돌계단 아래 백송나무를 올려다보며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언젠가 8월, 배롱나무가 월연정을 붉게 물들일 때 다시 오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월연정을 떠나 금시당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밀양읍성에 들렀다.

동문 우측에 차를 세우고 동문 마루에 오르니 망루인 무봉루가 눈에 들어왔다. 가파른 성곽 돌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 망루에 닿았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밀양 시가지는 한눈에 들어왔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금시당을 먼저 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 내려와 산책로를 따라 동문으로 나왔다. 내비게이션은 강변 주차장으로 안내했지만, 공사를 하던 분들의 도움을 받아 금시당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입구 주차 공간이 좁아 인근 국궁장에 차를 세웠다.

오연정이나 월연정과 달리 금시당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소나무들이 위엄 있게 서 있었고, 그 사이를 지나며 자연스럽게 걸음이 느려졌다.

금시당은 봄의 매화와 가을의 은행나무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 명종 때 문신 이광진이 지은 별서이며, 이곳의 은행나무는 그가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백곡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금시당을 복원한 이지운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 지은 서재다.

작은 쪽문을 지나 들어서자 오랜 세월을 견뎌온 매화나무가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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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는 은은한 향기를 품고, 500년의 시간을 말없이 전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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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안에는 배롱나무와 백송, 홍도나무가 자리하고 있었고, 뜰 밖에는 우람한 은행나무가 금시당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11월이 되면 이곳 또한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 것이다.

금시당을 나서기 아쉬워 밀양강변을 따라 잠시 걸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과 새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오전, 여러 정자를 지나며 서로 다른 시간과 풍경을 만났다.

각기 다른 계절을 품고 있는 장소들이었지만, 그 속에는 변하지 않는 고요와 여유가 있었다.

강은 말없이 흐르고, 정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를 잠시 지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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