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장날, 봄을 만나다

소박한 장터에서 건져 올린 봄의 온기

by 허정호

산청장날 봄을 만나다


시골집 마당을 가꾸기 시작하며 며칠을 머물렀다. 밤사이 멈췄던 보일러가 새벽 여섯 시를 알리듯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 잔잔한 기계음에 잠이 깼다. 3월의 끝자락인데도 이른 아침 돌길 위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아내는 차가운 공기가 좋다며 거실 문을 활짝 열었다. 서늘한 기운이 방 안으로 스며들자 나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고, 코를 킁킁거리며 뒤척였다. 그런 나를 보며 아내는 소리 없이 웃더니, 어느새 마당으로 나가 있었다.


그날은 산청 장날이었다. 오랜만에 맞는 장날이라 북적이는 풍경을 떠올렸지만, 막상 도착한 시장은 의외로 한적했다. 주차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시장 옆 도로에 여유롭게 차를 세웠다. 장바구니 수레를 끌고 천천히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물전과 과일가게들이 익숙한 자리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고, 그 앞에 자리 잡은 난전들이 장터의 숨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거리 모퉁이, 가장 넓은 자리에 봄꽃 화분들이 환하게 펼쳐져 있었다. 작은 사랑초 한 포트를 사 들고 향긋한 꽃내음을 맡으며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트럭 위에 가득 실린 칸나 모종 앞에서는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사장은 자기 농장의 꽃이 가장 예쁘다며 사진을 보여주었고, 그 말에 이끌리듯 모근 두 개를 샀다. 덤으로 작은 것 하나를 더 얹어주며 가을이면 번식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 한마디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풍성해졌다.


시장 초입에서는 봄나물과 약초를 파는 난전이 눈길을 끌었다. 목단 뿌리를 한 바가지 사니, 주인은 아무렇지 않게 몇 개를 더 얹어주었다. 토란 씨앗을 조금만 달라고 했더니, 옆집에서 구해와 건네주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지만, 그 안에는 계산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정이 흐르고 있었다.


묘목 판매대 앞에서는 한참을 망설였다. 지난해 인터넷으로 들였던 목련들이 모두 실패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결국 백목련과 자목련을 한 그루씩 골라 들었다. 직접 보고 고른 나무라 이번에는 잘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노란 목련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가격표를 보고는 아쉬움을 뒤로했다.


양파와 대파를 파는 좌판 앞에서도 발길이 멈췄다. 주인은 직접 농사지은 것이라며 넉넉히 담아줄 것처럼 이야기했다. 새 양파가 나왔지만, 우리는 저장해 둔 양파를 조금 샀다. 상태가 덜 좋은 것 두 개를 슬쩍 끼워 넣으며 먼저 먹으라고 건네는 손길에서 장터의 인심이 느껴졌다. 대파 한 아름도 함께 들었다. 곧 꽃이 피기 전에 서둘러 먹어야 할 것들이었다.


어디선가 언성이 높아졌다. 오토바이를 탄 아주머니가 길 한가운데서 장사하는 이를 향해 조금 물러서라며 말을 건넸다. 순간적인 소란이었지만, 그마저도 장터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정제되지 않은 소리와 움직임들이 오히려 살아 있는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잘 익은 토마토 한 바가지와 커다란 고구마 몇 개를 더 사며 장을 마무리했다. 손에 들린 것들은 소박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가득 차 있었다. 장날의 풍경은 요란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사람 냄새와 계절의 기운이 조용히 스며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장바구니 속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흙내음과 풀향기가 봄을 실감하게 했다. 그날의 장터는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라, 계절을 만나고 사람의 온기를 건져 올리는 자리였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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