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하니 Apr 07. 2022

자살 유가족으로 산다는 것

엄마가 날 두고 떠났다.

내가 열 일곱 살 때 엄마가 죽었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이 갑작스런 죽음의 이유를 물을 때마다 아빠는 대답했다. '심장마비'라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게 자살 유가족들의 아주 대표적인 거짓말이라는 것을 안다.



지난 8년 간, 엄마를 잃고 난 뒤 내 삶은 온갖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날 버리고 가버렸어?

 힘들다고 얘기하지 않았어?

 하필 그날이었어?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어?



통계에 따르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 중 유서를 남기는 비율은 전체의 10퍼센트도 안 된다고 한다. 우리 엄마도 유서를 쓰지 않는 대다수의 자살자에 속해 있었다. 덕분에 남은 가족들은 끊임없이 답을 찾으며 스스로를 자책해야 했다.


엄마가, 멀쩡하던 우리 엄마가 왜 자살을 택했는지는 아무도 몰랐으므로.



'어쩌면 두 자식들의 뒷바라지가 너무 힘들었는지도 몰라.'

'몇 년 째 아픈 몸이 지긋지긋했는지도 모르지.'

'고부갈등이 엄마를 너무 힘들게 했을 거야.'



하지만 내 짐작들은 모두 과정형이었다. 내 추측은 일부만 사실일 수도, 일부만 거짓일 수도, 어쩌면 전부 다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 누구도 (심지어 엄마마저도) 내게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알려줄 수 없었단 말이 옳겠지.


아무것도 모르던 고등학생 1학년에게 엄마의 자살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마치 신이 안배라도 한 듯이 완벽한 비극이었다.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나는 마치 사냥개라도 된 듯 집요하게 엄마의 죽음의 이유를 파고들었다. 생각을 하고, 하고, 또 하느라 잠잘 시간도 부족했다. 학교에서는 수업에 집중하지도 못했다.


우리 엄마가 왜 죽었을까. 아니, 엄마가 왜 날 버렸을까. 날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날 버리고 갈 수가 있지?


아빠 몰래 아빠의 짐을 모두 뒤진 적도 있다. 엄마의 사망진단서를 보기 위해서 말이다.



엄마가 죽은 이후 지난 나의 생은 끝없는 의문의 연속이었다.


하루는 엄마를 원망했다가, 미워했다가, 이해를 했다가, 그래, 그게 엄마의 결정이니까, 하고 인정하는 척을 했다가, 또 다시 엄마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이 모든 의문과 혼란을 내팽겨친 채 혼자 편해지겠다고 먼 길을 떠난 엄마를 비난하고, 심지어는 질투하기까지 했다가.


다시 엄마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엄마가 유서라도 쓰고 갔으면 무언가 달랐을까. 내가 엄마의 죽음을 납득하고 엄마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엄마가 쓴 글을 문장 단위로, 단어 단위로 부정하고 반박하느라 지난 8년을 소모했을지도 모른다.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자살하면 그 주변의 다섯 명에서 여섯 명의 사람이 극심한 충격을 받고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자살로 세상을 등지는 사람의 수는 130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하루 평균 35명 정도 된다.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의 평균 다섯 배에서 여섯 배가 나와 같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건데,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걸까?


우리 아빠가 장례식에 온 조문객들에게 심장마비라고 둘러대듯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일평생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의 이유를 쫓으며 살아가는 걸까?



그제서야 나는 또다시 집요하게 찾기 시작했다. 이번엔 자살유가족들의 흔적이었다.



나보다 먼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는 이 고통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승화시키는지, 삼키는지 찾기 위해 애썼다.


물론 현실에서 찾기는 힘들었다. 주로 인터넷에서 찾았지만 사실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로 세상을 등지고 떠났다는 걸 받아들이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말을 하는 것만으로 자해를 하는 것 같다.


'나랑 가까운 사람이 자살을 했어.'


우리는 많이 가까운 사이였어. 가족이었으니까. 서로를 향한 애정과 사랑이 있었지.


근데 왜 자살을 했을까? 내가 충분히 보살펴주지 못한 걸까? 왜 나한테 힘들다고 말을 안 했지? 혹시 내가 믿음직하지 못해서? 사실 나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나?


나는 왜 그 사람이 자살할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면서, 혼자 죽으려고 결심하는 것도 알아주지 못하고. 그래서 그 사람이 자살한 거 아냐? 자기 힘든 것도 몰라주는 가족이라서. 싫어서.



이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래서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의 자살 사실을 입에 올리는 건 시도만으로 매우 힘들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이나마 편해질까, 가족이 죽고 나도 따라죽고 싶었다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 느꼈던 감정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조금 위안이 될까, 이 고통이 나에게만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슬픔이 조금 가라앉을까 싶어 이 글을 쓴다.


엄마의 죽음의 이유를 찾아 헤매던 8년 전의 나에게 필요한 글이지만, 오늘도 어디선가 35명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한다면, 그 주변의 다섯 명에게 필요한 글이기도 하다.


단 한 명이라도, 이 글을 읽고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면, 핸드폰 화면 너머 나와 같은 고통으로 연결된 사람이 있다는 위로를 받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