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할 땐 왜 유서를 안 쓰는 걸까
엄마가 날 두고 떠났다 (2)
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는 일평생 당신의 인생을 모두 두 딸의 입시에 바친 사람이었다. 자식에게 관심 좀 있다는 대한민국의 어느 엄마가 안 그러겠냐마는 우리 엄마는 그 중에서도 좀 유별난데가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년 뒤 방영한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보며 나는 종종 "우리 엄마는 곽미향 (배우 염정아 님 캐릭터)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었지." 란 말을 하곤 했다. 내가 이 말을 할 때면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네 엄마가 좀 그런 면이 있었어."
그토록 헌신적이고 맹목적으로 딸들을, 특히 큰 딸의 입시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엄마가 우릴 두고 가버렸다니.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인정하기 어려웠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내 나이는 17살이었다. 대한민국에서 17살은 곧 고1이요, 대학으로 가기 위한 첫번째 입문이자 학생부종합전형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스타트라인이었다. 그것을 당신 입으로 그렇게나 강조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날 두고 가버렸다니.
그런 식으로 가버리면 내가 설마 드라마틱하게 "엄마의 죽음을 딛고 일어나겠어!" 따위의 말이라도 하며 씩씩하게 홀로 일어나 각성한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할 거라고 기대한 걸까. 아님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만큼 또 그런만큼 딸의 입시고 뭐고 다 지긋지긋해져 버린 걸까. (물론 후자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내 삶의 트리트먼트를 제시해 주던 엄마가 사라지자마자 내 인생은 곧장 휘청였다.
우리 엄마는 나의 대학 입시에 당신 나름의 계획이 있었어서, 나를 집에서 먼 자사고에 보내기까지 했는데 한순간의 그 엄마가 사라진 것이다. 순식간에 내 인생은 바닥으로 곤두박칠쳤다.
나는 학교 공부는 커녕 수행평가, 야자 따위를 모두 내팽개친 채 슬픔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만 했다. 와중에도 학교는 꼬박꼬박 나가야 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자사고였는데 집이 먼 학생들을 위해 (사실 그 학교 학생들의 대부분이 집이 멀었다.) 스쿨버스를 운영했다. 나는 학교 스쿨버스를 타기 위해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야만 했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스스로 일어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동안은 엄마가 매일 아침 나를 깨우고 아침까지 해먹여서 보냈는데. 엄마가 사라지자 그 역할은 모조리 아빠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항상 느긋하게 아침 8시 반쯤 일어나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느긋히 집을 나서던 아빠가 한순간에 새벽 6시에 일어나 큰 딸을 깨우고 아이의 아침까지 차려줘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까딱하단 다같이 나락으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아빠는 그 역할을 나름대로 충실히 이행해냈다. 내가 고3이 되어 수능을 볼 때까지.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엄마는 뭐가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
하필 고1, 대학입시의 중요한 길목에 선 나를 두고 갔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엄마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대학 입시가 그렇게 중요한 건 본인이 더 잘 알면서 어떻게 그런 나를 두고 갈 수가 있나. 나는 버림받았다, 엄마도 나를 포기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다행히 어찌저찌 현역으로 인서울 4년제에 합격하긴 했지만 이것이 엄마가 머릿속에 구상하던 내 진로는 아니었을 거다. 나는 수시 없이 정시로 대학을 갔는데 엄마는 학종으로 대학을 보내기 위해 자사고를 택했던 거니까.
지금의 나를 엄마가 본다면 뭐라고 할까. 어쨌든 대학은 가고 졸업도 했으니 잘했다고 할까. 아님 더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었는데 왜이렇게 낮은 곳을 갔냐며 뭐라고 할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평생 그것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왜 자살한 사람들은 유서를 쓰지 않는 걸까. 충동적으로 자살을 택하기 직전까지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어서 미처 유서를 쓸 시간이 없었던 걸까. 아님 주변 사람들이 너무나도 꼴보기 싫어 엿먹어봐라 하고 평생 미스터리 속에 살게 만들고 싶었던 걸까.
만약 후자라면 엄마는 제 목적을 가장 훌륭하고도 파괴적인 방식으로 달성을 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