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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니 Apr 21. 2022

자살 유가족으로 산다는 것 (2)

엄마가 날 두고 떠났다. (4)

17살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엄마는 집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엄마가 죽자 내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그 전에는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인생의 히든 스테이지를 힘겹게 깨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누구도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한다고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나에게 알려줄 만한 사람들조차 모두 각자의 슬픔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으니까.

 




엄마가 자살한 후,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당히 까칠하게 굴었다. 특히 이모들에게만.

그때는 모두 제정신이 아니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이모들은 우리 자매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해줘야 한다고 나름 필사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나대로 이모가 엄마 행세를 하려 한다며 싫어했다. 몇 년 동안 이모는 나에게 온갖 관심을 기울이고 참견을 하고 간섭을 하고 나는 나대로 온갖 방법으로 이모를 밀어내는 상황만 이어졌다. 특히 외갓집의 연락을 모두 다.

당시 나는 17살짜리 여자애였다. 가뜩이나 신경 쓸 것도 많은데 엄마의 죽음까지 감당하는 건 마치 온 몸에 쇠사슬을 휘감고 등산을 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살면서 그렇게 힘든 일이 없었다. 그런데 거기다 이모들까지 더해지니. 당시 내가 많이 힘들어하던 것도 이해가 간다.

나는 나 스스로의 슬픔만 감당하기에도 벅찼다. 온 몸에 슬픔이 가득차서 그것이 무심코 입밖으로, 눈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애쓰는 것만 해도 힘들었다.

그런데 거기에 똑같이 온 몸을 순도 100퍼센트의 슬픔으로 채운 이모가 다가온다니. 온 몸이 슬픔으로 가득 찬 두 사람이 부딪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부딪힐 때마다 넘실거리는 슬픔이 족족 넘치기만 하는 것이다.

이모가 내게 말을 건넬 때마다, 연락을 할 때마다, 이모의 온 몸에서 슬픔이 뿜어져 나오는 걸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것만 같았다. 평소라면 이모가 그것을 알아채고 스스로 제어할 테지만, 그때는 이모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리 둘다 미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모의 슬픔과 부딪힐 때마다 애써 붙잡고 있던 나의 슬픔까지 같이 새어나갔다.

나 스스로의 슬픔을 감당하기에도 힘든데 이모의 슬픔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러면서 이모를 향해 새어나가는 나의 날선 말과 그 안에 담긴 슬픔까지 봐야 했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비극을 겪고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들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누구는 계속 밖으로 풀어내려 하고 누구는 속으로 삭이려 한다.

나의 경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엄마의 죽음을 납득하고 내 안에서 슬픔을 결론지을 시간이.

당시의 이모를 만난다면 얘기를 해주고 싶다. 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나의 슬픔을 갈무리하는 것만 해도 힘들어서 이모의 슬픔까지 감당할 여력이 없다고. 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라고 말이다.

청소년이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경우 평균적으로 6개월의 애도기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애도 중이다.

아마 평생 엄마의 죽음을 애도할 것이다. 엄마의 인생 42년 중에서 17년 밖에 엄마란 사람을 알지 못했다는데에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나머지 3분의 2의 인생도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의 엄마이기 이전에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건 상당히 슬픈 일이다.

엄마가 안다면 뭐라고 할까. 아마 웃으며 수줍어할 것이다. 그리고 기뻐하겠지. 내가 당신의 인생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고, 사람 대 사람으로 친해지고 싶어하고, 인생의 동반자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에 대해. 언젠간 이 글이 하늘에 있는 엄마에게 닿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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