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나

by matilda

어릴 적, 책장에 꽂혀있던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는 표지부터 가히 압권이었다. 파랗게 질린 여자의 공포스러운 얼굴과 눈동자 없는 노란 안구를 가진 채 정면을 응시하는 검은 고양이의 삽화는 어린아이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강아지, 닭들과 뛰어놀며 동물을 자연스레 접했던 나이지만 이상하게도 고양이는 접할 기회가 없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길고양이'라는 호칭이 명확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길고양이, 들고양이도 아닌 '도둑고양이'가 우리들이 부르던 이름이었다. 사람을 피해 살던 고양이였으니 어쩌다 마주치는 그 모습이라는 건 건물 모퉁이에서 반쪽 얼굴만 내밀고 나의 모든 것을 탐색하듯 살펴보는 눈초리나, 가까이 다가가면 순식간에 달아나는 뒷모습이라던지 혹은 어두운 밤 갑자기 내 앞을 질주하여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는 광경이 고작이었다.

앨런 포의 소설에 나온 고양이처럼, 왠지 모를 마력이 더해진 것 같은 그 생명체는 내게 저주라도 걸 것 같았고 우연찮게 '도둑고양이'와 마주친 날에는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울음소리조차 인간 아기의 그것과 꼭 닮아서 잠이 안 오는 밤에 행여라도 듣게 되면 무슨 주문이라도 외는 것처럼 들려서 귀를 막아야 했다.


고양이라는 건 나에게 있어서 공연히 기분나쁘고 재수없지만 건드려서는 안 되는 생명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 직장을 얻고, 혼자 사는 삶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유로운 일상의 즐거움보다는 적적하고 무료한 감정이 짙어졌다. 자연스레 혼자 사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관문인 양 애완동물 입양에 관심이 생겼다. 지금에서야 반려동물이라고 그 호칭이 격상되었지만 당시에는 애완동물, 소유물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용어만큼이나 내 인식도 가벼웠다. 새장의 새에게 모이를 주고 관상하듯, 물고기를 어항에 넣어두고 때에 맞춰 밥을 주듯 좁디좁은 방 한 칸에 나 아닌 다른 생명체가 그리웠던 것이다.


처음에 생각한 건 강아지였다. 어릴 때 강아지와 놀던 좋은 기억도 있고 주인을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그 생명체라면 함께 살기에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축적된 인생 경험에서 알게된 바 개는 일단 똥오줌을 가리게 하기 쉽지 않고, 자주 짖으며 특유의 냄새가 나고, 무엇보다 집에 혼자 둔다는 것은 동물학대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 외로움 혹은 적적함을 달래겠다고 그 작은 생명체를 집에만 두기에는 최소한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교적 퇴근 후 시간이 많은 직업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 당시에는 사람들을 만날 일도 많았고 곰곰이 따져보니 집을 비우는 시간이 생각 이상으로 많았던 것이다.


결국 강아지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리고 몇 년을 또 혼자 살다보니 다시금 슬그머니 애완동물 입양에 대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고양이를 생각했다.

지인이 어디선가 구조한 고양이를 학대수준으로 방치하고 있었는데(털이 날리고 번거롭다는 둥 모종의 이유로 화장실에 두고 키웠다) 그 고양이를 내가 맡겠다고 자청했다. 키웠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변수들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인형처럼 생긴 페르시안 고양이의 외모에 홀렸다. 2살 언저리의 '마루'라는 이름을 가진 암컷 고양이는 그렇게 내 영역에 발을 들였다.


마루는 집에 오자마자 침대 밑에 숨어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아침에 눈을 뜨니 내 배 위에서 꾹꾹이를 하고 있었다. 살며시 만져보니 '아 이것이 생명의 신비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보드랍고 따스했으며 놀라울 정도로 연약한 몸이었다.

마루는 습한 화장실에 오래 방치되어 살아서 귓병이 있었다.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내가 마루를 케이지에 넣고 병원에 가고 귀에 약을 넣는 건 하루 중에 가장 큰 용기와 결심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었다. 마루는 순한 편이었지만 갇혀 있던 스트레스와 자유를 찾은 기쁨 때문인지 밤만 되면 우다다를 했다. 고양이가 우다다를 한다는 지식이 전혀 없었던 무지한 나는 그 소란에 매일 밤 놀랐다. 조금만 동물에 대해 공부했으면 알았을 텐데 놀아줄 줄도 몰랐고 우다다를 하는 행위에 대해 이해도 부족했던 나는, 낮에는 잠만 자다가 밤만 되면 눈을 번뜩이며 좁은 방 한 칸을 가로지르며 날쌔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무섭고 낯설었다.


꼭 어릴 적 건너건너 듣던 고양이 괴담마냥 밤에 마루가 아닌 한을 품은 어떤 영혼이 깃들어서 나를 놀래키는 것 같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었다. 지성을 갖춘 인간으로서 과학적 신념을 가지고 그럴 리 없다고 부정했으나 그 근거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본다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해 볼 생각은 한 톨도 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동물을 키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물며 지능을 갖춘 생명인데 인형처럼 돌보기만 할 백지같은 순진한 마음으로 덜컥 가족을 맞이했던 것이다. 입양율이 높아지는 것처럼 파양되는 경우도 많은 반려동물 시장은 나같은 사람으로 인해 고스란히 그 생명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밤에는 맹수처럼 날랜 마루였지만 아침에는 내 배 위에서 그르릉 대며 나를 깨워줬고 낮에는 천사처럼 곱게 잠만 잤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가지고 마루와의 동거가 3주 정도 지난 후 귀여움과 사랑스러움보다는 지킬 앤 하이드처럼 밤만 되면 변하는 마루에 대해 무서운 감정이 커지고 말았다. 마루를 화장실에서 구출했다고 동물인권수호자마냥 된 것처럼 으슥하던 나였지만 돌이켜보면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했고 고양이의 행동에 대한 이해조차 없던 내가 하던 행위 또한 학대였던 것이다.


그렇게 나만의 아늑하던 방 한 칸이 점점 불편한 공간이 되어갔다. 좁고 초라해도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던 그 공간이 속을 알 수 없는 생명체와의 불편한 동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행여나 내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마루가 알 것만 같아서 집에서는 안 그런 척 노력해야 했다. 그만큼 초록빛이 선명한 동그란 마루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어 보였다. 그러던 차에 지인부부가 키울 동물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마루를 그 집으로 보내기로 했다. 한 달여의 동거생활이 그렇게 허망하게 끝난 것이다.


마루를 보내던 날 미안함, 죄책감 그리고 알 수 없는 패배감에 눈물을 흘렸다. 마루는 기구하게도 그 집에서도 일 년여를 지내다가 또 어느 노부부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다행히 그 집에선 오래 정착한 듯 했으나 노화가 시작되며 뇌 쪽에 이상이 생겨서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로는 마음이 아파서 소식을 묻지 못했다. 책임지지도 못했으면서 안부를 묻고 걱정하는 내 마음이 위선적이고 불결하게 느껴졌다.


작고 가냘프고 예쁜 페르시안 친칠라 회색 고양이 마루가 고양이와 나의 묘연(猫緣)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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