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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Dec 14. 2023

“분수처럼 넘쳐나는 꼭두서니 노을에”

백년설의 노래 '아주까리 수첩'과 진홍색 염색재 꼭두서니 뿌리 천근茜根

백년설白年雪(1914~1980)이 1942년에 부른 노래 ‘아주까리 수첩’(작사 김다인, 작곡 이봉룡)을 먼저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U3beX0MIgVY)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주까리 수첩 (1942)


아주까리 꽃 그림자 흔들리는 섬 속에

하모니카 안타까운 강남달 시절

갈매기 울어 울어 해 지는 선창에

모자를 흔들면서 떠나던 사람아


분수처럼 넘쳐나는 꼭두서니 노을에

하모니카 불어 불어 떠나던 님아

날마다 선창 위에 배를 띄우며

당신을 기다려서 십년이 넘었소


맹서 남긴 방초 언덕 이슬비가 나린다

갈매기만 쌍을 지어 꿈을 부르네

실실이 풀어지는 노을 속으로

수평선 흘러가는 돛대만 헤이네.


(좌) 아주까리 - 2021.8.22 청계산, (우) 꼭두서니 - 2020.5.19 남한산성


출근길 차 안에서 백년설의 ‘아주까리 수첩’을 듣다가 꼭두서니를 만났다. 노랫말에서 꼭두서니가 사용된 것을 듣기로는 처음이라서 퇴근 후에 귀 기울여 다시 자세히 들어보았다. “분수처럼 넘쳐나는 꼭두서니 노을에” 였다. 꼭두서니는 꽃이 화려하지도 않고 주변의 식물을 뒤덮는 덩굴성으로 자라는 풀이라서 관상용으로도 적당하지 않은데 노랫말에 쓰이다니! 덩굴에 작은 가시들도 있어서 어렸을 때 맨 살을 많이 긁히기도 했던 잡초인데!


노랫말에서 “꼭두서니 노을”이라는 표현의 뜻이 언뜻 이해되지는 않는다. 어디선가 천연염색에 쓰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좀 더 찾아보았다. “전통사상과 천연염색 (김영숙, 조선조 후기 궁중 복식, pp.226~233, 1999)”에, “조선시대 왕의 곤룡포와 왕비의 원삼, 스란치마 등에 홍색이 사용되었으며 문무관리의 단령, 금관조복, 동다리에 홍색이 쓰였으며 대표적인 홍색 염료로는 홍화紅花, 소방목蘇方木, 천茜, 꼭두서니 등을 들 수 있다. 홍화는 우리나라에서 잇꽃(연지)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가장 선명한 홍색염을 할 수 있는 식물염재이나 너무 고가였으므로 일반 대중이 쉽게 구해 사용하기는 어려워 일반적으로 소방목이 더 많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라는 설명이 있었다.


(좌) 꼭두서니 줄기와 잎 - 2020.4.18 남한산성, (우) 꼭두서니 열매 - 2020.11.21 남한산성


앞에서 홍색 염색재로 소개된 천茜은 <식물의 한자어원사전>을 보면, 꼭두서니과 갈퀴꼭두서니(Rubia cordifolia)로 꼭두서니와 매우 유사한 식물이다. 천근茜根은 <동의보감> 탕액편에 약재로 기재되어 있으며, 우리말 ‘곡도숑 (꼭두서니의 고어)’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 풀은 진홍(絳)으로 염색할 수 있다. (此草可以染絳)”이라고 했다. <향약집성방>에서도 “천근茜根(꼭두선이 뿌리)은 천蒨이라고도 하며, 지금 근처에 다 있다. 비緋(진홍)색을 물들이는 풀이다. (茜根 一作蒨 今近處皆有之 染緋草也)”라고 하여, 우리 옛 문헌에서도 꼭두서니가 진홍색 염색재로 쓰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갈퀴꼭두서니와 꼭두서니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진홍색을 물들이는 천茜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이제 뜻이 통한다. 꼭두서니가 홍색으로 물들이는 식물성 염색재로 쓰였으니, 타는 듯한 짙은 붉은 저녁 노을을 ‘꼭두서니 노을’로 표현한 것이리라. 결국 ‘아주까리 수첩’은 섬마을 서쪽 수평선에 붉은 노을이 질 때 하모니카 불며 떠난 님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사랑과 이별의 노래인 셈이다. 아마도 이 노래가 처음 불리었던 1942년경에는 꼭두서니가 염색재로 쓰인다는 사실이 일반적인 상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주까리 수첩은 아주까리 기름칠한 수첩일까? 아주까리 기름 바른 정든님이 준 선물일까?


이 노래는 가사를 바꾸어 재취입되었는데, 재취입 버전의 가사에도 ‘꼭두서니 노을’은 살아남았다.


아주까리 꽃 - 2021.8.22 청계산


(재취입 버전)

아주까리 꽃 그늘이 흔들리는 섬 속에

하모니카 슬픈 곡조 울리던 임아

강남 달 옛 노래를 물 위에 흘리고

모자를 흔들면서 떠나가는 사람아


분수처럼 넘쳐나는 꼭두서니 노을에

하모니카 불며 불며 사라진 님아

선창에 맺은 사랑 선창에 흘리고

기적을 울리면서 떠나가는 사람아


아주까리 동백꽃이 곱게 피는 섬 속에

하모니카 소리 맞춰 만나던 님아

밤마다 그 노래가 가슴에 스밀 때

수줍은 섬 아가씨 안타까운 그 사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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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사진 : 꼭두서니 열매 - 2022.10.8 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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