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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Nov 23. 2023

“가슴은 와들와들 황철나무요”

이난영李蘭影(1916~1965), 알어 달라우요, 1936

지난 6월 식물애호가 모임에 참여하여 목포 유달산을 걸으면서 남도의 나무를 감상한 적이 있었다. 석류와 털마삭줄, 굴피나무, 왕자귀나무는 꽃이 만발하였고, 말오줌때, 멀구슬나무, 예덕나무, 합다리나무 등 남도의 나무들을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때 유달산에서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를 만났다.


… 유달산 잔디밭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흘러간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


유달산 이난영 노래비, 목포는 항구다. (2023. 6. 10)


대표적 항구 도시라는 것 외에 목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여서, 이 노래비를 읽으면서 비로소 나는 이난영李蘭影(1916~1965)이라는 가수와 그의 고향이 목포인 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목포시민들이 얼마나 이난영을 좋아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출근 길에 목포를 대표하는 가수 이난영의 노래를 듣다가 식물애호가로서 깜짝 놀랄 구절을 만났다. 황철나무로 들리는 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시가에 나오는 꽃과 나무에 관심을 가져온 터였는데, 시로 분류할 수 있는 노래 가사에서 황철나무를 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퇴근 후 노랫말이 정말 황철나무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 노래와 가사를 찾아보았다. 이난영이 1936년, 스무 살 청춘 시절에 부른 ‘알어 달라우요’라는 노래의 마지막 절이었다.


가슴은 와들와들 황철나무요

눈물은 흘러 흘러 대동강이라

마음은 타고 타서 재가 되오니

어쩌면 고렇게도 몰라주나요


이 가사를 확인하고 나니 내 ‘가슴은 와들와들’ 정도는 아니지만 작은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아마 식물애호가들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고전의 식물에 관심이 큰 내가 왜 기뻐했는지를. 


우리 속담에 “사시나무 떨듯 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사시나무 잎은 잎자루가 길어서 미풍에도 잎새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졸저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양楊, 류柳 - 우리 삶과 함께한 한반도 대표 수종, 버들과 사시나무” 편에서 다룬 적이 있는 이 사시나무는 학명이 Populus davidiana이고, 영어로도 정확히 “To tremble like an aspen tree.”라는 표현이 있다. 이 영어 표현의 뉘앙스는 잘 모르겠지만, “사시나무 떨듯 한다.”에 대해서 나는 보통 추위에 떨거나 두려움에 떨거나 할 때 비유하는 표현으로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1936년도 청춘들의 사랑 노래 가사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가슴은 와들와들 황철나무요.”라는 표현을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황철나무는 학명이 Populus maximowiczii이고 사시나무와 같은 사시나무속(Populus) 나무인데, 사시나무 뿐 아니라 황철나무도 ‘와들와들’ 잘 떨리는 나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처음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내 애장서 <한국의 나무>에 따르면 황철나무 국내자생지는 강원도 심산 하천 및 계곡부이고, “잎자루는 길이 1~5cm”이다. 사시나무는 경남, 전남 이북의 산지 계곡부 및 사면에 자라고 “잎자루는 길이 1~5cm이며 앞면이 납작하다.” 내가 관찰한 한가지 차이는 사시나무는 도심에서 정원수로 심어진 경우를 보지 못했는데, 황철나무는 창경궁과 사직공원 입구에 정원수로 자라고 있어서 서울에서도 감상할 수 있는 나무라는 점이다. 


황철나무 (2018.11.3 창경궁)


다같이 미풍에도 잎이 잘 떨리는 나무이지만, 다소 부정적 환경에서는 사시나무를, 긍정적 환경에서는 황철나무를 쓰는 것 아닌가라는 망상을 해 보다가, 다시 이난영이 부른 ‘알어 달라우요’ 가사의 맥락을 살펴보니 사랑을 얻지 못해 가슴이 떨리는 상황이다. 아무렴 어떤가. 황철나무도 잎이 잘 떨리는 나무의 대명사로 사용된 용례인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열린 해,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딴 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 정간된 해, 민족 대다수가 독립을 염원했을 것이고,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 뿐 아니라 만주나 북간도, 상해, 러시아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투쟁했던 그 엄혹했던 시절에도 이효석은 “메밀꽃 필무렵”에서 장돌뱅이의 삶과 사랑을 쓰고, 이난영은 사랑이 이루어지길 애타게 기다리는 청춘을 노래했다. 아무리 환경이 엄혹해도 삶은 살아가야 하고 사랑은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이난영李蘭影(1916~1965)이 1936년에 노래한 “알어 달라우요” 가사를 전부 읽어본다. 


병아리 면도(面頭)같이 연붉은 마음

가슴에 맺힌 사연 풀 길이 없어

옷고름 매만지며 가슴 태우네

어쩌면 고렇게도 몰라주나요 네 알어 달라우요


활짝 핀 젊은 가슴 달래 주구려

맘에만 간직하고 말은 못 건네

눈웃음 지우랴면 눈물 앞섰네

어쩌면 고렇게도 몰라주나요 네 알아 주랑께


말 못한 허물만을 죄라시나요

남의 속 몰라주는 죄는 더 커요

야속코 무정하고 야멸차구려

어쩌면 고렇게도 몰라주나요 네 알아 주시유


가슴은 와들와들 황철나무요

눈물은 흘러 흘러 대동강이라

마음은 타고 타서 재가 되오니

어쩌면 고렇게도 몰라주나요 네 알아 주게나

(박영호 작사, 김해송 작곡)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고 소위 반공이 국시가 되면서 이 노래가사의 대동강은 한강수로 바뀐다. 분단 상황은 노래마저 원래 가사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오호라!

(2023.11.22)

+황철나무, 2021.4. 오대산 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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