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우리 집
다섯 번째 우리 집은 하숙집이었다. 네 번째 우리 집을 떠나고 새 학기를 맞아 우리 집을 하숙으로 정한 것은 순전히 학교를 계속 다니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번 학기를 망칠 경우 3회 연속 학사경고로 퇴출될 수 있었기 때문. 결국 아버지는 힘든 농사일을 해 마련한 돈으로 나의 하숙비를 지원해 주셨다.
내가 다시 학사경고를 맞아 퇴출될 경우, 이제 문제는 나 하나로 그치지 않게 되었다. 이미 나는 산악부에 깊이 관여된 상태였고 다음 후배들을 위해 산악부에서 일정한 역할을 요구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많던 동기들이 부득이 군대에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동기 중에 나이가 가장 어렸던 나는 산악부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더욱이 나의 바로 위 1년 선배가 없는 상황이어서 자칫 산악부의 맥이 끊어질 수 있는 위기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이래저래 나는 이번 학기에 매우 착실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셈.
나는 학교 근처 나의 학과에서도 산악부실에서도 가까운 곳에, 그리고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곳에 하숙집을 구했다. 70,80년대 연속극에서 본 듯한 익숙한 풍경의 집이었다. 가운데 마당에 공용 수도가 있어 씻을 수 있었고 각자 방에서 잠만 자다가 식사시간에 부엌 옆 거실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
거금(?)을 들여 방을 얻은 만큼 마음이 경건해졌고 잘해보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찌 보면 첫 번째 우리 집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온전한 나의 공간이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3월 개학 후 하숙집에서 한 가장 첫 번째 일은 수강신청 준비였다. 입대를 앞둔 산친구 몇 명이 내 방에 모여 나의 수강신청을 도와준 것이다. 경고를 두 번 맞은 주제에 이런저런 고민할 게 없었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친구들이 알고 있는 쉽고 학점 획득이 수월한 과목들 위주로 골라 수강신청을 마무리했다.
하숙생활은 너무 좋았다. 아무런 눈치를 볼 것도 없었고 내가 먹는 밥은 떳떳한 것이었으며,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어떻든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이든 저녁이든 식사할 경우에는 밥을 최소 두 그릇이상을 먹었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다른 학생들이 일어난 후 혼자 남아서 밥을 먹는 내가 보기 싫었는지 행주질을 하며 얼른 일어나길 종용(?)하는 듯했지만, 난 꿋꿋이 끝까지 다 먹었다.
빨래는 옷이 많지도 않았고 같은 옷을 자주 입었으니 부담은 아닐 거 같았지만, 산에 갔다 와서 내놓는 옷이 더러워 고생을 좀 하셨으리라.
하숙집의 매력 중 하나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다른 과 선후배 동기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식사를 같이 하니 그럴 수밖에 없고 순서를 기다려 화장실도 가고 씻기도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자던 방 옆에는 문과대 복학생 형이 살고 있었는데, 그 형은 하숙방에 텔레비전까지 들여놔 여러 사람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형이다 보니 종종 술을 사 와 나눠 먹기도 하고 이런저런 재미있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나는 이공대생이어서 그런 문대생들의 달변을 참 좋아했다. 신기했고 나는 언제 저런 걸 배우나 하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이때가 월드컵이 있던 해인데, 이 형 방에서 한국축구의 골결정력 부족을 실감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내가 착실한 삶을 살며 변화를 꾀했지만, 이미 지난 1년간 쌓인 이미지는 쉽게 개선되질 않았는데, 친구들과 술모임이 어쩔 수 없이(?) 계속된 것이다. 후배들이 들어왔으니 우리가 겪은 만큼 또 선배로서 모임에 많이 참석해야 했다. 나의 하숙집은 그래서 종종 친구들의 잠자리 역할을 했다. ‘우리 집’이 가까우니 어쩌면 더 편하게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사람의 첫인상이라든지 그에 씌워진 이미지는 그만큼 중요하다. 난 흔히 말하는 ‘술꾼’이 되어 있었고 쉽게 자리를 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하숙을 하고 착실한 맘을 갖다가도 남들에게 각인된 이미지를 바꿔가며 살기는 쉽지 않았다.
한편, 이번 학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면고(학사경고 면제)를 위해서 공부는 소홀할 수가 없었다. 수업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고 과제도 충실히 했다. 산악부에서는 나의 면고가 그만큼 절박했는지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에는 산행을 엄금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사실 그 정도 조치까지는 과한 것이었으나 나도 굳이 저항하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산악부 생활은 이제 나에겐 대학생활의 근간이 되어 있었다. 모든 중심엔 산이 있었고 산이 최우선이었다. 신입회원을 받기 위해 2학년 선배로서 역할을 해야 했고 주장 형의 요구사항들을 충실히 수행해야 했다. 산악부에 가입해 놓고 산에 오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는 신입생을 기숙사나 시험장소 구별 없이 쫓아다녔고 산에 가서는 선배의 역할을 위해 이것저것 가르치기도 하고 운행 중 지쳐 미적 되면 혼내고 달래 가며 산행 완성을 위해 애를 썼다.
무엇보다 2학년이 되면서 암벽등반의 선등을 서야 했는데, 이게 좀 부담스러웠음에도 비교적 잘 적응한 편이었다. 아마 시골 촌놈 출신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점점 더 산이 좋아졌고 어려운 코스를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그동안 고등학교 이후의 패배감을 극복하고도 남았다. 몸도 단련이 되어 가벼웠고 산타기 아주 좋은 상태가 되어 갔다. 그러니 산은 더욱더 재미있어졌다.
하숙생활은 예상대로 너무 편했고 이제야 진정한 대학생이 된 거 같았다. 한편 이걸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도 그만큼 커졌다. 여전히 난 ‘내가 알아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다른 친구들처럼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하는데 누굴 가르치냐며 주제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렇게 한 학기는 마무리되어 갔다. 안정적인 하숙생활 덕분에 학사경고는 면할 수 있게 되었고, 산은 내게 더욱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 나를 이끌었으나, 앞날은 여전히 불확실했다. 주말에 산에 가고 주중에 열심히 공부하는 이 편한 생활은 오래 못 갈 것 같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한 학기가 끝나면서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 하숙집을 나왔고 방학을 맞아 시골 첫 번째 우리 집에 다시 돌아갔다. 그러다 한 달 정도 있다가 같이 하숙하던 옆방의 문과대 형이 생각나서 다시 같은 하숙집에 들어갔다. 그 형은 내가 밥 먹는데 행주질하는 아주머니가 싫어 버릇없게 굴면 나를 나무라기도 했는데, 왠지 편안함이 있었는지 그 형 생각이 났었다.
다시 들어가서 하숙을 계속하나 했는데, 그 형 역시 그 아주머니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지 나보고 하숙을 나가 자취를 하자고 제안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형 때문에 하숙집에 다시 온 거라 잠시 고민하다 금전적 문제도 있고 혼자 남기도 싫어 수락하고 말았다.
결국 나의 다섯 번째 우리 집 생활은 이것으로 끝이 나게 되었다. 그래도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학교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고 산에서도 성공적으로 적응했으니 나름 괜찮은 성과를 갖고 다섯 번째 우리 집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악필, 202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