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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Dec 30. 2023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4

네 번째 우리 집


자유라는 것은 나에게 매우 중요했다. 자유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이 있을 때는 아무 거리낌 없이 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주 내에서 합법적으로. 나는 그동안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런 자유가 생기기를 그렇게도 고대했음이다. 그 자유라는 것이 그만큼 내 삶에 대한 책임이 내게 오롯이 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감히 무조건 나는 선택하고자 했다. 그걸 제대로 갖지 못해 왔다고 생각했으니까.


초중학교 시절 첫 번째 우리 집에서는 미성년자이기에 함부로 뭔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고 그렇게 교육받았다. 두 번째 우리 집에서는 고등학생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꽁꽁 동여매여져 생활하는 느낌이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라는 것을 갈구했다. 그 여파였을까, 세 번째 우리 집에서의 생활도 그 자유롭다는 대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치도록 더 자유롭고 싶었고, 아니 당시 제대로 된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제는 조금만 자유롭지 못해도 견디기 힘든 지경까지 이르렀다. 설사 몸은 자유롭다 해도 정신은 의식은 자유롭지 못했다. 내 삶을 내 소신껏 살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세 번째 우리 집을 나왔을 때, 나는 마음 단단히 먹고 자유롭기로 결심했다.


호기롭게 마음은 먹었으나 당장 갈 데가 없었다. 어디든 갈 수는 있을 만큼 자유로웠지만 내가 머물 데는 없었다. 그때는 이미 산에 다니는 게 한참 재미있을 때였기에 학교 산악부실에서 잘 수도 있고 텐트 빌려서 어디는 못 살겠냐, 하는 객기가 있었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론, 난 전혀 걱정하고 있지 않았고 막막한 앞날로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자유로움에 방점이 찍혀 있었던 듯하다. 철없는 젊은이.


이때까지도 그랬고 향후에도 그랬지만 내 삶엔 적절한 때에 적절한 곳에 희한하게 지원자들이 나타났는데, 그중 하나가 당시 산악부의 주장 형이었다. 나는 1학년으로서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지만 학기를 마치기 전에 ‘우리 집’이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어딘가에는 머물러야 했다. 그때 그 형이 누구한테 내 사정을 들었는지 선뜻 자기 집에 와 살 것을 제안했다.

산악부 1학년은 지금이나 그때나 귀했는데 우리 동기들이 특히나 많았었다. 너무 재미있게 생활하던 차였는데, 나의 집 없음이 정작 본인보다 그 형에게 더 크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동계 산행을 남겨 두고 나의 불안한 삶이 결원으로 이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당연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삶은 이미 도가 터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지겹게 생각했던 것을 또 그렇게 별일 아닌 듯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형이 안 받아줬다면 어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책이 전혀 없었다. 부모님한테는 이미 내가 알아서 한다고 큰소리치며 나왔을 것이다.


나는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을 싸 들고 형 집에 들어갔다. 그 집은 나의 네 번째 우리 집이 되었다.

형은 3대째인지 4대째인지 독자로서 집안의 소중한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형의 자취집은 내가 보기엔 없는 게 없었다. 텔레비전, 라디오, 카세트, 카세트테이프, 등산용 침낭, 조리기구, 이런저런 책들, 책상, 무엇보다 자기 방. 나는 그런 집에서 그 형 옆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잠자리를 만들었다.


어쨌든 이래저래 나에게 산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는 걸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그 후로 모든 산행에 참석했고 나 또한 그에 적응이 되었고 산이 참 좋았다. 산보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공간은 없었다.

꾸역꾸역 두 번째 학기를 마무리하고 방학을 맞았을 때는 역시나 묘한 상황이 되었다. 여전히 전공에는 정을 못 붙이고 있었고 앞날은 막막했다.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불안한 마음으로 동계산행 준비를 했다. 그렇다고 재워주고 먹여주는 형을 생각할 때 산행 또한 소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산을 안 간다고 성적이 달라질 것도 아니고, 나 역시 산을, 아니 산마저, 절대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막연히 잘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여유가 있었다.


네 번째 우리 집은 학교랑도 가까웠고 같이 산에 다니는 형하고 살아서인지 비교적 마음도 편했다. 특히 형은 자기 전에 항상 당시 형이 선정한 베스트 송을 카세트에 틀어놓고 잤었는데, 그게 어찌나 좋았던지 나는 가사 하나하나를 외우기까지 했다. 특히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라는 노래를 너무 좋아해 그 가사를 며칠 듣고 정말 암기하고 속으로 노래도 자주 불렀더니, 나중에 산에 가서 거뜬히 노래를 뽑아낼 정도까지 되었다.

형은 굳이 라면이 다 끓고 나서야 계란을 넣는, 나로서는 이해 못 할, 취향도 있었고,  어찌나 깔끔한지 나와는 다른 인종인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형은 당시, 나의 유일한 보호자였고 나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구세주였다.


동계산행에 대비해 빙벽등반 훈련도 하고 체력훈련도 하며 앞날에 대한 아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산에 빠져 들었다. 산 이외의 그 무엇도 생각하기 싫었고 자신이 없었다. 산 말고는 맘 편한 곳이 없었고 산 말고는 아무것도 자신 있는 게 없었다.


동계 산행이 끝나고 그 형 집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바로 첫 번째 우리 집에 내려가 살았고, 다음 학기에는 맘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두 번째 학기의 결과는 결국 학사경고. 나는 겨우 두 학기 다녀 놓고 두 학기 모두 경고를 맞음으로써 퇴출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첫 학기야 진로에 대한 고민과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후회 등등으로 방황하는 시기였다면, 두 번째 학기는 산, 산, 산에서 새로운 삶을 접하고 빠져 들게 되며 학사경고로 이어졌다.

이제 나의 방황하던 삶에, 내가 적응을 실패한 전공의 빈자리에 산은 강력한 인상을 남기며 내 인생에 훅 들어와 버렸다. 그래도 학교를 계속 다녀야 산악부 생활도 할 수 있었으니, 나는 어쨌든 공부를 해야 했다.


나의 네 번째 우리 집은 내가 산으로 삶의 방향을 잡는 계기가 된 셈이다. 산은 내 인생의 목적이 되었고, 나머지는 산을 위한 수단으로 위계가 정해졌다. (악필, 2023.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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