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우리 집
내가 대학 입학시험을 위해 묵게 된 집은 서울의 큰아버지 댁이었다(실업계를 추천한 큰아버지가 아니다).
서울 큰아버지는 내가 첫 번째 우리 집에 살 때 자주 오셔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텔레비전도 선풍기도 여러 헌 옷가지들도 가져다주셨다.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의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해주신 셈. 특히 7남매 중 유일하게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신다고 해서 더욱 각별히 아껴 주셨다. 친구분들이랑 시골 우리 집에 와서 집 앞 냇가에서 잡어를 잡아 어죽을 끓여 먹기도 했고 명절 때마다 푸짐한 선물을 들고 오기도 했다.
방학 때마다 외갓집 한 번 서울 한 번 가곤 했는데, 서울에 가면 큰아버지 댁은 항상 베이스캠프(서울에 작은 아버지 포함 친척들이 가까이 있었다)가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입고 갔던 옷을 다 버리고 속옷부터 겉옷까지 환골탈태를 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런 큰아버지 댁에 나는 학력고사를 위해 아버지랑 묵었었다.
더불어, 합격자 발표 또한 큰아버지 댁에서 확인했는데(이건 고향에서 해도 되었을 텐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 외숙모댁에서 짐정리 겸 올라왔을 수 있다.), 어느새 큰아버지 댁은 자연스레 대학 다닐 장소로 거론되었다.
결국엔 큰아버지의 승낙으로 나는 또 한 번의 친척 신세를 지게 되었고 민폐는 계속되었다. 개인적으론 하숙이나 자취를 했으면 했지만 아버지의 사정을 알기에 말도 못 꺼냈고, 더욱이 기숙사에도 묵지 못하게 되어 더욱 면이 안 서 군말없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큰아버지는 정말 친자식이 대학생이 된 것 마냥 축하도 하고 양복에 대학생 가방까지 사 주며 나를 지원해 주셨다.
큰아버지는 도시로 올라와 온갖 고생을 하며 자리를 잡은 케이스였다. 시골의 가족이 워낙 가난하다 보니, 무일푼으로 바닥부터 삶을 다지며 집도 얻고 자리도 잡았지만, 결국 병을 얻고 말았다. 번 만큼 베풀 줄 아셨던 정말 착하신 분이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큰아버지는 듬직하고 공부 잘하는 큰아들이 있었는데, 그 형은 중학교에서 진로를 고민하다 부모님 고생하시는 걸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그걸 그렇게 한스럽게 생각하셨다. 이걸 보고 다른 큰아버지네 사촌 누나(나를 실업계로 추천한 큰아버지의 딸)는 친히 중학교 1학년 생이었던 나에게 편지를 써 ‘너는 그러지 마라’며 인문계를 추천했던 걸 보면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또 그런 사연 많은 집에서 버젓이 얹혀살며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형 또한 한이 되었는지 고졸 출신으로 대기업에 다니면서 전문대 입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서울 큰아버지 댁은 나의 세 번째 우리 집이 되었다. 그 집은 다세대의 현대식 빌라 1층 집이었는데, 거실에 방 3개가 딸린 나름 (내가 느끼기에) 최신식 집이었다. 큰아버지 부부와 3남매가 사는 집에 나는 없는 자리를 또 비집고 들어가 살게 되었다.
아버지와 같이 간 입학식에는 큰아버지가 사주신 양복을 입고 갔는데, 결국 선배들이랑 술 먹느라 입학식 날부터 집에 못 들어갔던 기억. 그 양복에 바로 담배 구멍을 냈던 기억. 이런저런 행패에도 대학생이라고 큰 문제 안 삼았던 기억. 나는 그렇게 세 번째 우리 집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것이 2 지망이건 아니건, 내가 원하는 전공이건 아니건, 나는 대학에 다닐 자격을 얻었음엔 틀림없었다. 참으로 힘들었던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나서 얻은 결과물이니 엄청 기뻐해야 하겠으나, 한편으로는 원치 않는 전공을 공부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나는 합격을 한 것인가, 탈락을 한 것인가. 그 힘든 생활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보상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님은 잘 알았음에도, 받아 든 결과물은 참으로 묘했다. 그래도 재수를 못 할 상황에서 어떻게든 대학생의 끈을 잡고 백수는 면하게 되었으니 다행인 줄 알고 엄청 고마워해야 하는 게 당시로서는 제 분수에 맞는 생각이었다.
사실, 학력고사를 한두 달 정도 남겨 두고 아버지가 갑자기 올라오셨었다. 이유는, 등록금이 부담스러우니 취업도 확실한 교육대학을 가라는 당부를 하고자 함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면 안정적이고 등록금도 싸니 국립 교육대학을 가라고 말이다. 아마도 중3 때 실업계 고등학교를 추천한 큰아버지의 영향력 같았다. 나는 거의 아무런 번민이나 고민도 없이 속으로 그럴 일 없다는 걸 알았다. 알았으니 내려가시라고 잘 말씀드리고, 난 전혀 등록금이 싼 것과는 거리가 먼 사립대학을 지원했다. 공부를 월등히 잘하진 못했으니 우리나라 최고의 국립대학은 꿈도 못 꿨고, 그저 남들이 많이 가는 사립대학을 가고만 싶었다.
한편, 담임 선생님도 나의 지원 의도를 잘 알고 존중해 주셨지만, 아무래도 고생길이 훤히 보였는지 나에게 세무대학을 추천해 주셨다. 등록금이 없는 데다 세무사가 되는 지름길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그 마저도, 나의 그 십 대 시절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님 반항심이었는지, 집안 사정 때문에 뭘 포기한다는 게 죽기 만큼 싫었다. 그게 불나방 같은 짓이더라도 내가 가고픈 데를 향해 방향을 잡고 최선을 다해 가야 후회가 없을 거 같았다. 그러다 안 되어도 내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니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지레 집안 사정 등으로 원치 않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라 해도) 데를 지원해서 생기는 끝도 모를 후회나 회한 속에 내 인생을 집어넣고 싶지 않았다.
결국 다 내 고집 대로 하고 말았다. 다만, 한 가지 선생님의 충고를 들은 건 있다. 나는 당시 공대를 지원했는데, 마지막 학력고사이고 매우 안 좋은 내신을 감안하여 나름 하향 지원을 한 게 토목공학과였다. 난 촌놈이니 나름 터프한 이미지가 맞을 것 같았고 물리와 지구과학을 좋아한 나로서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전자공학이나 전산학과 정도는 선망은 했으나 내신을 극복하기 어려운 당시 모의고사 점수로는 아쉽지만 포기해야 했다. 또 한편 생각해 보면, 촌스런 나와는, 컴퓨터는 자판도 쳐 보지 못한 나와는, 안 맞을 거 같기도 했다(자기 합리화였나?). 물론 그렇다고 좀 멋져 보이는 기계공학이나 건축공학 정도도 생각해 봤지만(지금 생각하면 그 마저도 나랑 안 맞았을 거 같다), 학력고사가 마지막이고 재수는 어차피 못하니 안정적 지원이 절실했다. 당시 공대에서 토목공학과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니 나에게는 아주 잘 맞는 틈새 공략이라고 나름 생각했고 나의 날카로움(?)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선생님의 사인이 필요했고 선생님도 그 정도는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이 추천한 식품공학과가 생각났다. 전망이 좋고 남학생들이 충분히 갈 만하다고 조회 시간에 공개적으로 추천한 적이 있었다. 여학생들이 많이 가는 식품영양학과의 선입견으로 친구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학과였다. 나는 과감히 2 지망에 그걸 넣어서 선생님의 원활한 결재(?)를 도모한 것인데, 그 2 지망에 합격을 하게 된 것이다.
입시 결과에 굳이 핑계를 대자면, 당시 내가 지원한 학과는 다른 공대 학과에 비해 경쟁률이 훨씬 높았고(3.6:1. 이걸 기억하고 있다니.), 그것은 다들 나 같은 생각에 하향지원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험 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는데, 역시나 커트라인이 공대에서 상위권이 될 정도로 올랐고 나는 떨어지고 말았다(당시기계공학과 등 다른 전공은 1.2:1 수준의 경쟁률에 커트라인도 낮았다. 모든 게 예상 밖이었다.). 전략 실패.
학력고사 또한 유래 없이 쉬웠는데, 문제 난이도를 보고 너무 자신감을 갖은 나머지 우수수 실수를 연발. 나름 선방은 했지만 기대에 못 미쳤다. 마인드 컨트롤 실패.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내신이었으니, 그동안 쌓아온 업보가 고스란히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자업자득. 내신 극복 실패.
이러한 실패의 연속에도 불구 대학을 다닐 자격을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완벽한 실패자인 나는 2 지망을 사랑해 보기로 했다.
그래도 막상 합격을 하고 더더욱 묘했던 것이, 나는 고2 때부터 화학과 생물은 완전히 접고 좋아하는 물리와 지구과학에 매진해 왔는데, 화학과 생물만 하는 전공으로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건 뭐랄까, 꼼수의 실패? 아님 징벌? 항상 매사에 모든 것에 성실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 한 가지. 학력고사 전 예비소집일에 우연히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 시골 중학교에서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는 일도 드물지만, 지원자들의 모임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한 것 또한 참으로 기적 같았다. 친구가 맞았다. 그 친구는 당시 가장 인기 있는 학과 중 하나인 ‘전자공학과’를 지원했고, 합격도 했다. 물어보니 지방의 한 신설 후기 고등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기숙사 생활하며 고교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공부는 잘했지만 많이 드러내지 않은 데다 고등학교를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는데, 그렇게 보니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솔직히 나름 충격이었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친구라 이상할 건 없는데, 문제는 내가 그동안 뭘 한 건가? 하는 자괴감이었달까? 난 도대체 그 고생을 하며 뭘 한 건가? 비효율도 이런 비효율이 없으며, 허튼짓도 이런 허튼짓이 없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박수를 받고 화려함 속에서 고등학교에 들어가 실속 없이 힘만 쓰다 초라한 성적표를 받은 기분은 참으로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비교를 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그걸 완전히 통제하기 또한 불가능한 나이였다.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미련 맞았고 그야말로 실패의 복합체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뭐가 어떻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세 번째 우리 집의 친한 사촌 형의 말대로 ‘먹고 대학생’이 되었다. 담배 피우고 술 먹고 먹고 먹고 또 먹고 놀고 놀고 또 놀고. 전공에 흥미가 없으니 미래를 잊기 위해 마냥 취하고 놀고먹었다. 취하고 깨면 또 앞날을 고민하며 답답함을 느꼈고 또 취하고 깨고 또 취했다. 역시 악순환. 고등학교의 그 실패감을 쉽게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수업은 빼먹기 일쑤고, 고3 담임이셨던 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나름 고액과외도 3달을 못 넘기고 불성실함으로 잘렸다. 유일한 자금줄을 날려 먹은 셈. 술 먹느라 친구 만나느라, 빼먹기 일쑤였고 성실하지 못했다. 변명 투성이었고 치졸했으며 유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점점 불량스러워졌고 삐뚤어져 갔다. 어쩌면 그동안 겪지 않은 사춘기를 이때 경험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점점 더 점점 더 갈피를 못 잡았다.
그러는 사이 나를 응원해 주고 지지해 준 큰아버지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몇 번 더 입원치료를 하셨다. 집에 오셨어도 나는 거의 매일 술에 취해 늦게 들어왔고, 아침마다 큰아버지 가족들이 식사중일 때 매너 없이 구역질 소리 내며 양치를 하느라 불쾌감을 한가득 안겨드렸고, 어떨 땐 만취해서 토하고 사촌 누나가 뒤처리를 하느라 고생도 했다. 나는 매너도 없고 배려도 없고 경우도 없는 그저 삐뚤어져 가는 고주망태이자 망나니였다.
사실 세 번째 우리 집에서 차분하게 그리고 바르게 성장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큰아버지 가족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는데, 큰아버지네 작은아버지네 포함 모든 사촌들까지 근방의 한 교회에 다녔다. 나도 전에 몇 번은 갔었던 곳이다. 일요일이 되자 모두 교회에 가는데 나만 빠지기 뭐 해 따라간 적이 있다. 다른 친척들도 만나니 충분히 갈 만했다. 근데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듣고 속으로 따지느라, 점심 후 손뼉 치며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에 질려서, 나는 그 뒤로 다시는 교회 근처도 가지 않았다. 어차피 차분히 순응할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지금도 무신론자다. 어쩌면 바르게 성장할 기회는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공부는 몇 번 시도하다 내키지 않고 흥미를 끌지 못하자 나에게 안 맞는 쪽으로만 논리를 피며, 공부하기를 거부했다. 그저 현실이 싫었다.
수업시간에 버젓이 잔디밭에 누워 봄볕에 뒹굴거리다가 저녁이 되면 선배들 따라 친구들 따라 술을 먹었다. 시험기간에는 그동안 불성실한 탓에 공부가 버겁기만 했고 금방 지쳐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첫 학기가 지나고 방학을 맞았다. 결과는 당연히 과내에서 최저점으로 학사경고.
과에서 간 농활을 마치고 나의 첫 번째 우리 집에서 빈둥빈둥 보내다, 할 일 없이 돈 써가며 학교에 어슬렁거리다, 문득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내 등록금을 내느라 소도 팔고 논도 팔았는데, 너무 한량 같은 삶에 소모적인 삶을 사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사실 등록금 걱정 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큰소리치며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었는데, 아버지는 그래도 자식이 서울에서 대학 다닌다고 뿌듯해하시며 꾸역꾸역 학비를 만들어 주셨던 것이다. 난 절대로 내가 알아서 하지 못했다.
고민 끝에 2학기가 되자마자 나는 산악부에 들어갔다.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라는 문구는 당시의 내 심장에 확 꽂혀 버렸다. 그 산악부 활동은 나랑 잘 맞았고 드디어 사는 맛이 났다. 대학생활을 하는 기분이 났다. 신이 났다.
근데 이게 또 나의 세 번째 우리 집에는 더 큰 민폐가 되었다. 매주 지저분한 옷들, 술은 줄지 않고 멤버만 바꿔 더 먹어댔고, 집에는 더욱 늦게 들어갔다. 끝없는 민폐.
그러다 그해 11월쯤. 산에 갔다 왔는데,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두 번째 우리 집에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세 번째 우리 집에서는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큰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나는 세 번째 우리 집을 나오게 되었다. 그동안 나 때문에 겪었을 큰아버지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제 나도 성인이니, 나 스스로 뭐든 해보리라 생각했다. 난 차라리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젊지 않은가. 그리고 그건 다이내믹 20대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악필, 2023.12.22)